하산님(@Hasan_2cha)의 하이큐 2차연성 마법사AU기반 3차연성입니다.

너무 매혹적인 세계관 감사합니다8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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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론을 배우기도 전 마법을 구사하는 전례없는 천재였다.

그랬다.          

 수없게도.

                                                



마법사의 서번트가 되는 과정에는 영혼의 반을 넘겨주는 엄청난 헌신이 필요하다.’

팔락팔락 소리를 내며 빠르게 넘어가던 책장은 카게야마가 그 문장을 발견한 순간 정지했다. 그가 인상을 쓰자 허공을 날던 책이 얌전히 손으로 내려온다. 카게야마는 찌푸린 얼굴 그대로 헌신이라 적힌 단어를 문지르다 거칠게 덮었다. 카게야마의 옷에서 떨어진 먼지가 까만 책 표지에 하얗게 달라붙는다.

표지에는 [서번트, 이해의 시작]이라고 적혀있다. 저자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으나 둥그런 글씨체가 눈에 띄는 조금 낡은 책이었다. 대개 마법사들의 책이란 스승의 스승으로부터 내려오는 귀중한 수제품. 그래서인지 그에게 책을 빌려주었던 마법사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카게야마는 아직 다 읽지 못한 내용에 대한 미련과 함께 책을 던져버리고 걸음을 옮겼다.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던 책은 수풀에 떨어지기 전, 검은 불꽃에 휩싸여 불타 사라졌지만 카게야마는 돌아보지 않았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동쪽의 마법사, 스가와라의 식탁에 얌전히 옮겨졌음을 알기 때문이다.

집중하지 않아도 마력을 느낀다. 숨 쉬는 것처럼,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마력을 다룬다. 한계를 모른다. 원리를 깨우치기 전에 감으로 마법을 시작한 카게야마는 마법사로서 누구보다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단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면, 바로 서번트의 부재였다.

일반 사람들이나 일부 마법사들마저 마법사라면 서번트가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그들과의 계약은 개인의 선택이다. 카게야마는 스스로 서번트를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마법사들이 서번트를 찾는 이유는 다양하다. 단순한 심부름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정령, 혹은 이종족인 그들의 이능을 빌리기 위한 경우다. 드물게는 서번트가 멋대로 계약을 맺는 일도 있었다. 또 일부 마력이 불안정한 마법사들은 안정을 목적으로 서번트를 찾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굳이 서번트가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었다. 궁중 최고 마법사로서 남부럽지 않은, 아니 남이 부러워할 부가 있었다. 거기에 필요한 것을 말하면 바로 준비해주는 하인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불과 얼음이라는 상반되는 속성 마법을 구사하는 그가 다른 이능을 빌리고자 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궁에 소속되어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그를 찾아오는 변덕쟁이 서번트는 없었으며-그럼에도 강제 계약을 맺는 동료들도 있었으나-, 불안정이라는 말은 카게야마의 마법사생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그러므로 그 당시 그에게 서번트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탁-

불티가 튀는 소리에 카게야마는 발밑을 쳐다봤다. 무성한 수풀을 피하고자 사용한 마력이 모이고 응축되다 불의 속성을 띄어 발화하고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서니 딱 사람 모양으로 공백이 생겨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카게야마는 그 모습에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고유한 특징인 검은 불꽃만을 쳐다봤다. 불에 내성이 있을 야생식물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타들어간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불이 사라지자 붉은 불이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크기를 불려나갔다. 진작 마력을 끊어버렸으면 됐을 것을 카게야마는 굳이 기다리고 기다렸다. 통제가 안 되는 불이 주변을 아무리 불태워도 그의 몸은 조금도 상하지 않는다. 노랗고 붉고, 하얗기도 한 불 속에 가만히 자리한 카게야마는 후- 하고 가볍게 입김을 불어 주위를 얼렸다. 삽시간에 얼음 꽃이 피어올랐다. 하얀 입김 끝에 매달렸던 얼음 결정은 카게야마의 손이 닿자 녹아내렸다.

다른 누군가 보았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경지는 카게야마에겐 소꿉놀이만도 못한 장난이었다. 비록 그가 소꿉놀이를 해본 적이 없을지라도. 일부러 마력을 사용하기 위해 산불을 방치했던 카게야마는 단순히 시간 낭비를 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궁중마법사에서 파면당한 지금 그에게 시간은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갈 길이 바쁜데, 하고 생각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는 일이란 대게 그럴 것이다.

그는 남쪽의 마법사를 찾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겐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사람이다. 선배라는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는 그 남자는 카게야마를 싫어했다.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숨어 버릴지도 몰랐다. 아니, 그라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그러나 확률이 반반인 것과 백퍼센트인 것에는 차이가 있어 기척을 숨겨왔던 것이다. 이정도로 들킬 리가, 하고 생각하며 카게야마는 날뛰는 마력을 완벽히 갈무리하고 걸었다. 남쪽은커녕 동쪽에도 어울리지 않는 견고한 얼음성을 뒤로 하고서.

*

'더 이상 못 어울리겠어. 우리는 네 장기 말이 아니야.'

'--왕이 승하하셨다! 새로운 왕을 맞이하라!! 왕의 앞날에 영광과 축복을!'

'나에게 헌신하지 않는 마법사는 필요 없다.'

'이제부터 궁중 최고 마법사는 저입니다.'

'넌 모를 거야.'  '맞아, 얜 모를 거야.'

평생!!!’    평생!!!’

"--, -! ! 죽었냐고!!"

분명 옛 일이었음에도 바로 어제와 같이 선명한 기억이다. 카게야마는 뻣뻣한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을 뿐이다.

무시냐!”

처음 듣는 목소리와 따끔한 고통이 카게야마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눈꺼풀이 풀로 달라붙었는지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동시에 카게야마는 자신이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있는 힘껏 인상을 쓰자 가는 틈새로 붉은 땅과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그그그귺, 그렇게! 봐도 아아아안 뭇섭거든?!!” 하는 괴성과 함께 그림자가 몸집을 키웠다.

정체 모를 상대로부터의 위협을 인식하자 몸이, 아니 마력이 먼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기력이 다한 몸이 살짝 떠오르고 그 주위로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움직였다.

-이이익!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멀어졌다. 카게야마는 흐릿한 시야로 그 움직임을 포착해내고 두 번 놀랐다. 하나는 생각했던 것에 비해 덩치가 아주 많이 작았기 때문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움직임이 신묘했기 때문이었다. 그림자는 한 번의 도약으로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마력을 따라 유연하게 멀어졌다.

시야에 가득해 크다고 인식했던 것은 단순히 가까웠을 뿐으로 실제 그림자는 병아리와 비슷한 크기였다. 긴장이 풀린 카게야마가 땅으로 내려앉자 검은 병아리가 다시 포르르 날아왔다. 난다기보다는 높이 뛰는 것에 가까운 움직임이다. 마력이 잠잠해지는 최단거리를 따라오는 모습을 카게야마는 무심코 멍하니 지켜봤다.

너 죽어?”

비명을 지르며 멀어졌던 것에 비해 순진하다 못해 격이 없는 물음이었다. 무슨 헛소리냐 멍청아! 라고 외치려던 입에서는 갈라진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병아리는 겁이 많은지 털을 불리며 또다시 도망쳤다. 카게야마는 병아리에게서 신경을 끊고 몸을 회복하는 데에 집중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굶주림이었다.

마법사의 몸은 일반인들과는 조금 다르다. 원리는 알지 못해도 우수한 마법사일수록 신체 또한 튼튼하고, 멀리 보며, 잘 듣다. 그 중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마법사라면 무의식중에 인식하고 있는 특징이다. 다만 먹지 않고서 체력을 유지하려면 신경써야할 부분이 많아 다들 평범하게 음식을 섭취할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뱃속에 마력을 모아 온 몸으로 기운을 돌렸다. 불을 삼킨 것처럼 뜨거운 열이 손끝이며 발끝에 퍼질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목이 갈라졌던 것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물을 만들어내어 천천히 삼켰다. 차가운 물이 뱃속으로 들어가는 게 온전히 느껴졌다. 기이한 느낌을 받으며 카게야마가 눈을 뜨자 땅에 머리를 박고 있는 병아리가 보였다. 저게 숨는다고 숨은 것일까, 의문이 들었으나 신경쓸만한 꺼리도 아니었다.

?? ! 너 죽는 거 아니었어?”

카게야마가 그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기자 따라 붙으며 한다는 소리가 또 흉흉한 소리였다.

? 아까부터 뭔 헛소리냐 멍청아!”

그치만 인간은 안 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너 삼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그 말은 삼일 동안 카게야마를 몰래 쫓아왔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작고 작아 무시할만한 녀석이라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용암지대에 접어들며 카게야마는 아침저녁으로 마력을 퍼뜨리며 오이카와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런 비실비실한 녀석이 따라오는 것은 느낀 적이 없다.

카게야마가 충격을 받는 사이 병아리는 쫑알쫑알 거리면서 카게야마를 잡아먹으려고 했다는 웃기지도 않은 원대한 계획을 털어놓고 있었다.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금방 죽어버리면 시체를 먹으려 했다는 말이었다. 왜 굳이 시체냐 묻자 병아리는 좀 더 동그란 모습으로 나는 까마귀니까! 라고 외쳤다. ‘병아리가 아니었군.’ 카게야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모르고 작은 까마귀는 외쳤다.

내가 지금은 아주 작지만 말이야! 아주 많이 먹으면 누구보다 크고 멋진 까마귀가 될 거야. 그래서 누구보다 높은 하늘을 날 거야!”

가망 없는 이야기네.”

넌 금방 죽을 거야. 카게야마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무슨 소리야. , 내가, 지금 작다고 얕보는 거야?”

무섭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나?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얕봐서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살피니 까마귀의 몸 상태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깨워준 보답으로 좀 더 살게 해줄까, 하는 생각으로 카게야마가 손을 뻗었을 때였다.

까마귀가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눈앞에서 사라졌다. 카게야마의 눈으로도 간신히 쫓을 수 있었던 움직임이었다. 카게야마가 몸을 움직여 생긴 아주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을 역으로 타, 그의 팔을 감아 올라왔다.

올라왔다고?’ 카게야마가 손을 들어올리기 전 정수리가 찔렸다. 짐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아팠다. 마력이 카게야마를 감싸고 폭발했다. 이번 것은 피하지 못했는지 까마귀가 멀리 날아갔다. 처참한 모습을 겨우 피해 엉덩이로 착륙한 까마귀는 고함쳤다. “난 안 죽어! 난 날 수 있다고!!”

찾았다. 무엇을? 내 서번트.파트너.

카게야마의 생각을 앞서 마력이 움직였다. 의지를 가진 힘이 까마귀를 향해 뻗어갔다. 까마귀는 이리저리 잘 피했으나 어마어마한 양에는 당해낼 수 없었는지 곧 붙잡혔다.

주주주주죽일테면 주주주격라!!”

안 죽여. 너 이름은?”

,히나타. 눈치를 보던 까마귀가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좋아. 히히나타.”

틀려! 히나타다!”

이름 따위 뭐 어때, 라고 생각하면서도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카게야마 토비오. 마법사다. 하고 스스로에 대해 밝혀도 히나타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래서? 라고 할 뿐 그에 대해 아는 눈치가 아니었다. 왠지 모를 안심을 하며 카게야마는 특별히 친절하게 히나타에게 제안했다.

내 서번트가 되라. 살려주마.”

너 말야! 서번트가 뭔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붙잡고 왕님처럼 되어라! 살며주마! 한다고 예 알겠습니까, 할 것 같냐!!”

별로 친절하게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서번트가 될 수도 있는 생물체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진 소환에 응하지 않는 것으로 거절당해왔으니까. 왕님이라고 비교 당한 단어에는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카게야마는 생전 처음 겪는, 일생일대의 유혹을 앞두고 머리를 굴렸다.

둘의 관계에서 이득을 얻는 것은 마법사만이 아니다. 계약은 강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즉 서번트 또한 마법사에게서 무언가를 원해 그의 곁에 있는 것이다.’

문득 얼마 전에 읽은 책의 구절이 떠올랐다. 무언가, 무언가라니 대체 무엇을 원한다는 건지 알 수 없다. 마음에 안 들어도 끝까지 읽었어야 했는데! 카게야마는 뒤늦은 후회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히나타가 더 겁을 먹은 것은 당연했다.

! 마력을!”

?”

나와 계약하면 너 내 마력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

고민 끝에 졸부의 능력 자랑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마력? 그게 뭔데?”

바보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고함소리가 온 몸을 부들부들 떨게 했다. 잘 보여야 한다는 인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카게야마는 책에 적힌 이론적인 설명을 떠올렸다가 이 녀석은 못 알아듣겠지. 하고 정답을 떠올렸다.

힘 빼고, 가만히 있어.”

다른 생명체에게 마력을 넘겨주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순간 되살아나는 나쁜 기억을 고개를 저어 날리며 히나타에게 집중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히나타의 몸은 마력이 부족했다. 먹는 것으로 채워지는 양은 움직이는 것에 소모되니 성장이 있을 수 없었다. 자연 생태계에서 약한 것은 도태된다. 어느 정도 부모에게 기생하더라도, 이렇게 부족한 몸으로는 곧 기력이 다해 죽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히나타는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충족감에 놀랐다. 아무리 배가 부르게 먹어도 느껴지던 공허함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좀 더, 더 많이, 이것이 있다면 분명 더 크게 자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 무렵 카게야마가 손을 뗐다. 카게야마는 몸집은 작으면서 엄청 먹는다고 투덜거렸다. 마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히나타는 이게 필요했다.

하자! 서번트 할래!”

카게야마는 마력이라는 단어에도 무지한 히나타에게 서번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무를 수 없는 영혼의 계약이라 해도, 더 강해질 수 있다면 히나타는 아무래도 좋았다.

두 결핍의 만남이었다.

 

*

만났어. 도깨비가, 방망이를

서쪽의 깊고 깊은 숲 속, 길잡이가 있어도 헤매는 숲의 한 가운데에 살고 있는 서쪽의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그럴 것 같았어. 잘도 살아있네, 그 녀석.”

말이랑 행동이 다른데?”

스가한테 연락 받자마자 켄마를 찾아온 주제에.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마법사의 고양이가 말했다. 쿠로, 그만해. 서쪽의 마법사, 켄마는 자신의 서번트를 가볍게 제지하며 오랜만의 손님을 향했다.

사용법을 깨닫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아마 잘 지낼 거야. 이 이상은 나도 보기 어려워.”

그것도 그럴 것 같았어. 천재란 참 재수 없단 말이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면서도 시원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켄마는 그 점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만나러 갈 거야? 한 마디 물었을 뿐이다.

-! 내가 왜??!”

발을 쿵쿵 구를 때마다 불티가 뛰었다. 습기가 가득한 늪지대인 덕분에 불은 붙지 않았다.

고생하고 고생해서 만나러 오면 말해줄 거야. ‘서번트 하나 생긴다고 마법에 통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어? 마법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네요!’ 하고!”

성격 참 나쁘다니까.’ 그 당사자의 서번트인 이와이즈미를 포함하여, 오이카와를 제외한 모두의 생각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쿠라모치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작은 우연과 타고난 눈썰미의 조합에 의한 결과였다. 그냥 잘못 본거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뇌리를 스친 한 순간의 깨달음을 쿠라모치는 놓치지 않았다. 쿠라모치는 당황하는 대신 얼굴을 찌푸리고 주변을 살폈다. 자신 이외에 알고 있는, 혹은 알게 된 사람이 있는지 찾기 위해서였다. 기분이 나쁜 줄 알고 시선을 피하는 동기나 후배는 제쳐놓고. 쿠라모치는 제일 먼저 형제를 닮아 눈치가 빠른 코미나토를 살폈다. 눈은 쉽게 마주쳤다. 쿠라모치는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를 몰라 인상 쓴 얼굴 그대로 고갯짓을 했다. 의문스럽게 바라보던 코미나토는 쿠라모치의 은근한 신호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 하고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코미나토는, “에이준군. 편식은 안 좋아. 낫토도 다 먹어야지.” 하고 말했다. 물론 사와무라의 편식 따위 쿠라모치가 알바가 아니었다.

, 낫토만 봐줘. 낫토만

안 돼.”

하룻치차가워졌어.”

코미나토는 상냥한 말투로 특별히 따뜻했던 적도 없다고 대꾸하며 사와무라의 투정을 무시했다. 은근한 압박을 무시하지 못한 사와무라가 억지로 낫토를 삼키는 것을 보고서 코미나토는 쿠라모치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왠지 칭찬을 바라는 느낌이라 쿠로모치는 억지로 표정을 풀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미나토가 수줍게 고개를 돌리자마자 쿠라모치는 자신의 식판에 고개를 파묻듯 집중했다. 코미나토가 모른다면 2학년 중에 알고 있을 녀석은 없을 것이다. 1학년은 더욱 가망이 없었고, 3학년 중에서는 그나마 나베가, 그런 쿠라모치의 생각을 막듯이 앞 테이블에서 소란이 일었다.

미유키 카즈야!!!! 바보라고 하는 쪽이 바보라고!”

하핫, 그건 아니지.”

2학년 투수가 3학년 포수의, 심지어 주장의 멱살을 쥐는 하극상을 보고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1학년에게도 익숙해진 광경이었다. 그만큼 평범하고도 똑같은 일상에 쿠라모치가 마음을 놓는 것도 잠시. 옷을 찢어버릴 듯한 기세로 흔들어대던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웃음이 섞인 만류와 손짓에 쉽게 힘을 뺐다. 그리고 식탁 밑으로 내려간 두 손의 은근한 스침을 또다시 목격하고 만 쿠라모치는 시끄럽다고 외치는 것도 잊고 아연실색했다. 잘못 봤다고 믿고 싶었지만 한 번 신경 쓰기 시작하자 너무도 강렬히 눈에 밟혔다.

주전포수 미유키 카즈야와 좌완투수 사와무라 에이준은 배터리와 별개로 특별한 사이임이 틀림없었다.

 

동급생과 후배의 미묘한 사이를 눈치 챈 쿠라모치가 느낀 것은 경멸이나 혐오가 아닌, 대체, 도대체 언제부터? 라는 순수한 의문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동급생은 둘째 치고, 시끄럽고 귀찮고, 또 시끄러운 사와무라가 무언가를 조용히 숨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언제 보아도 선후배 혹은 배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두 사람은 식당에서만 아주 작은 틈을 보였다. 그냥 보기에 사와무라는 항상 시끄러웠고, 미유키는 그를 등지고 무시한 채 밥을 먹거나 장난치며 끼어들어 성질을 건들이곤 했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식탁 밑에서, 미유키의 왼손과 사와무라의 오른손은 조심스럽게 닿다가 얽히고, 떨어지다 또 달라붙는 것이다. 그냥 스치듯 본다면 옆에 앉아있으니 부딪히나보다, 라고 생각될 정도로 가볍지만, 지켜보고 있는 쿠라모치가 부끄러워질 만큼 조심스럽고 애틋한 움직임이었다.

또 한 번 언제부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익숙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지도 모를 예전부터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이 익숙하게 됐다고 쿠라모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단 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항상 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와무라의 옆에는 후루야와 코미나토가 있었고, 가끔은 카네마루와 토죠, 또 가끔은 그 자신-쿠라모치-와 조노나 나베가, 더 가끔씩 시라스나 카와카미, 그리고 조금 익숙해진 후배들이 함께였다. 사와무라의 곁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별히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하더라도 뭐, 사와무라니까. 혹은 두 사람은 배터리니까, 하고 넘겼을 게 분명했다. 며칠 전까지의 쿠라모치가 그랬듯 의문조차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간신히 지난 기억을 뒤진 쿠라모치는 그들이 테이블에 합류할 때마다 변명처럼 늘어놓던-물론 변명이라고는 생각 못할 만큼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말들을 떠올렸다. 그날 시합의 반성회, 투수로써의 마음가짐에 대한 잔소리, 공 받아주십쇼, 공 받아주세요, 같은 지금도 딱히 다르지 않은 말을 꺼내는 사와무라나 미유키는 딱히 자리를 가리지 않고 상대의 근처에 앉았던 것 같다. 지금처럼 꾸준히 나란히 앉는 모습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 번뜩 스친 생각에 쿠라모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맹랑한 후배가 끔찍하다 못해 귀여웠고 짜증나는 동기가 안쓰럽다 못해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자타공인 연습벌레인 사와무라는 다른 사람에 비해 밥을 먹으러오는 시간이 늦은 편이었다. 지난겨울, 부상으로 연습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미유키의 식사시간은 빨랐지만 속도는 느려졌었다. 당시에는 움직이는 것이 별로 없으니 기본 할당량을 해치우는 게 힘들어 그렇다고 생각해 적당히 먹으라는 조언까지 해줬건만. 그때의 미유키는 사와무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고 쿠라모치는 깨닫고만 것이다. 닿고 싶다는 생각에 왼손잡이를 핑계 삼아 일부러 팔을 부딪치는, 그 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사와무라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밖에 하지 않았을 미유키를 생각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짧은 손장난을 보고 제법 많은 것을 알아낸 쿠라모치는 긴 한숨을 내쉬고 입을 다물었다. 숨기고 있는 사실을 굳이 아는 척 언급하며 파헤치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앞으로도 못 본 척 하리라 마음먹었다. 다만, 앞으로도 마음고생이 심할 동실의 후배에게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것 정도는 해도 될 거라 생각하며 매점으로 향했다. 웬 일이냐며 수상쩍어하는 사와무라의 팔을 붙잡고 관절기를 시전하게 될 미래는 알지 못하는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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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써야할 건 이게 아니지만, 갑자기 삘 받은김에 짧게..

부제는 쿠라모치 요이치의 발견 정도로.. 또 삘받으면 관찰편을 쓸 예정....인데 사진얘기부터 끝내고 쓸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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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행사에 다녀온지 1주일이 훌쩍 지났네요. 전날 밤차로 올라가서 땀 뻘뻘 흘리며 돌아다닌게 엇그제 같은데ㅠㅠㅠ 전부 미사와 책이라는 생각에 눈이 돌아가서 행사장 사진은 찍을 생각도 못했다는게 조금 아쉽네요. 물론 존잘님들의 작품인 등신대와 반신대는 찍어왔습니다ㅇㅅㅇ)9 사진을 볼때마다 집이 멀다고 포기한게 안타깝고ㅠㅅㅠ


처음 참가한 행사였고 첫 회지라서 부족한 점이 많았는데, 좋은 행사에 참가하게 되서 덕을 본 것 같습니다. 특전으로 드릴 외전도 그 날 부스에서 접어야 했고, 잔돈 준비한다고 다른 회지 사러갈 돈은 챙기지 않아 ATM기를 찾아 뛰어야 했지만요. 심지어 저는 미사와에 눈이 돌아가서 부스에 제대로 붙어있지도 못했었죠. 그런 불성실한 부스러에게도 선물을 챙겨주신 이름모를 분들 감사합니다! 맛있게 잘 먹었어요8ㅅ8 정신없이 지른 책들 택배로 보내려고 고민하고 있을 때 버리시려던 상자를 함께 찾아주신 뒷 부스 분들께도 신세를 졌습니다. 이분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라서 명기는 못하고 감사함만 받아주세요ㅠㅠ


저의 전리품들에 대해 말하자면, 눈물나게도 계속 봤으면서 미루다가 선입금을 놓친 책도 있고, 하도 선입금과 수량조사를 많이 했더니 닉네임을 남겼는지 이름을 남겼는지, 네이버폼 작성만 했던건지 기억나지 않아 많은 민폐를 끼치며 찾아왔네요. 아직 다 읽지도 못한 엄청난 양의 미사와로 한동안 행복하게 지낼 것 같습니다.

책 내주신 존잘님들 모두 너무 감사드려요. 놓친 책들은... 다음 번 행사에 재판되기만을 빌어야 할 것 같습니다8ㅅ8


감사하게도 수량조사로 이름을 남겨주신 분들도 대부분 다 찾아가주셨고 현장에서도 구매를 해주셔서 재고는 거의 남지 않았어요. 대운동회때는 그냥 온리 소비러로 참가할 것 같아서 남은 책을 어쩔까 고민이 되기는 한데, 언젠가 필요할 날이 있겠죠^ㅅ^ 여러번 말하는 것 같지만 정말 구매해 주신, 읽어주신 분들 감사드려요.


신간 '그 의 이야기'에 대해서 짧게,

좀 더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서 친해지는 과정을 쓰고 싶었는데 시간에 쫓겨 급하게 마무리 짓게되어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닌데다가, 처음 구상했던 길에서 살짝 빗나간 방향으로 나아간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래도 해피엔딩으로 끝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물 책은 표지밖에 보지 않았고, 내용을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_◑) 재밌게 봐주셨다면 다행입니다.


후기 쓰려고 그 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행사였어요. 올해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로 행사참가를 꼽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재밌었습니다!

"안녕하심까. 사와무라 에이준이라고 합니다."

", 미유키 카즈야입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손을 내민 남자는 아주 젊었다. 미유키는 자신의 나이는 생각지도 않은 채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설명은 이미 들었다. 사와무라 에이준. 25. 해외에서도 상을 받은 적이 몇 번인가 있다는 포토그래퍼. 사람의 본성을 찍느니 자연의 이면을 찍느니 어쩌구 저쩌구하는 수식어를 들었지만 별로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미유키에게 사진이라는 것은 그냥 사진이었다. 나중에 이런 일도 있었지 하고 추억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 사실이 찍혔거나 조작이 들어갔거나 그 이상의 감상은 없었다. 땀 흘린 만큼 결과가 나오는 운동선수이기 때문일까, 큰 노력 없이 얻어진 결과물로 성공했다 평 듣는 이가 좋게 보이진 않았다. 저를 찍겠다고 찾아왔음에도 잘해줘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기 그지없어 웃는 낯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갑작스럽게 부탁드려서 죄송합니다. 혹시 설명 들으셨습니까?"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탐탁지 않은 표정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연신 웃으며 말했다. , . 대충. 하고 미유키가 말을 흐렸다. 사와무라는 설명을 들었다는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숨과도 같은 탄성을 흘리며 사와무라는 앉아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미유키는 그제야 아무리 싫은 상대라지만 손님을 계속 세워놨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지려면 경기가 끝나고 갓 씻고나온 사람을 찾아온 사와무라를 탓해야했다. 더 따져들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적거리다 약속 장소를 찾아가지 않은 미유키의 탓이라 그는 말없이 의자를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싹싹한 인사에 미유키는 입을 다물었다. 사회생활 잘하네, 라는 단순한 생각과 달리 유명하겠어, 라는 비틀린 마음이 드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미유키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아도 사와무라는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미유키에게도 앉으라 가리켰다. 그리곤 매고 온 짐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더니 아무 말 없이 내용물을 펼쳐놓았다. 당연하겠지만 전부 사진이었다. 그것도 이, 삼십대로 보이는 여자들만 있었다.

"! 이거 자신작이에요!" 하고 사와무라가 내민 것은 확실히 다른 사진과 달라 미유키도 눈길을 주고 있던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 있는 여성은 다소 품이 크고 딱딱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많이 어리게 봐주면 고등학생이라고 말해도 믿을 것 같은 어린 여자. 입가가 금방이라도 바르르 떨릴 것처럼 경직된 미소를 띈 그녀는 카메라 렌즈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전문 모델은 아닌 게 분명했고 아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게 자신작이라고?'

미유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와무라는 어때요? 어떻게 보입니까? 하면서 미유키의 감상을 재촉했다. 별로 감상 같은 건 자신이 없는데, 말을 흐리자 뭐든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된다는 그 눈동자가 너무나 반짝여 미유키는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칭찬만 듣고 살았을 어린 청년에게 누구나 다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말해주고 싶기도 했다. 한 번 크게 데이면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약간 있었다.

"별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네요. 웃는 것도 이상하고 초조해보이고 당신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어딜 보는지도 모르겠고... 원래 이렇게 정면에서 찍으면서 렌즈 보라는 소리도 안합니까?"

나름 말을 고르긴 했다. 사와무라가 그를 거절하게 만들 심산이었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윗사람'의 귀에 들어가게 될지도 몰랐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는 정도로 해결을 봐야했다. 예상 밖이었던 것은 사와무라의 반응이었다. 말을 너무 정중하게 했나? 아니면 말 귀를 못 알아듣나? 라고 의문이 들 정도로 사와무라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일어나 달려들 것 같아 미유키는 몸을 조금 뒤로 뺐다.

"대단해!! , 죄송합니다. .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거에요! 제가 찍고 싶었던 거! 이 날은 그 분의 첫 출근길이었거든요. 위축되어있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모든 부정적인 생각은 다 들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도 있는, 실수해버릴까 걱정스러우면서도 잘 해낼 거라 희망도 갖고 싶고, 모르는 사람에게 근거 없는 응원을 들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지만 하등 도움도 안 되는 그런 상황인거죠! 제 카메라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있겠슴까."

사와무라는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팔을 붕붕 휘두르며 표정연기까지 곁들이는 모습이 혼자보기 아까울 정도였으나 미유키는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것만 겨우 인식했다. 뭣 모르는 척 이름값을 언급하며 잘 찍었다고 했어야 했다. 완전히 자신의 세계에 빠진 사와무라 몰래 미유키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세계의 전환은 아니지만 넓어지는 갈림길에서!! , 죄송합니다. 지루했죠?"

빠른 반응에 미유키는 반사적으로 아니라 고개를 저었다가 고개를 끄덕일 타이밍이었다고 또 뒤늦게 후회했다. 아차,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미유키는 그냥 빨리 용건을 해결하고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닙니다. 그보다 제가 뭘 하면 되는지 설명해주시겠어요?"

". . 그렇죠."

미유키의 냉랭한 대답에 사와무라는 조금 기가 죽은 듯 보였다. 커다란 가방 속에서 두 장의 서류를 꺼내 말없이 내미는 것을 건네받았다. 상단에는 '계약서'라는 단어가 조금 지저분한 손 글씨로 적혀있었다. 보통은 인쇄하지 않나? 그런 의문은 내용을 읽는 순간 사라졌다.

"보름 동안 24시간을 따라다니면서, 찍은 사진들 중 하나는 반드시 전시회에 채택이 되는데 그 선택권은 너한테 있고 나는 거부권이 없다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미유키가 인상을 썼다. 예의 차리던 말투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려보는 미유키를 사와무라는 움찔하지도 않고 올려다봤다.

"설명 들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 구단이랑 계약된 내용이에요."

밑에 도장 있잖아요. 하며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가리켰다. 확실히, 본래라면 자신의 사인이 들어가 있어야 할 곳에 구단의 도장이 찍혀 있었고 대리인으로 구단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글씨체는 감독의 것이었다. 빌어먹을. 참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욕설이 튀어나갔다. 사와무라는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설명을 대충 들었다기에 반쯤은 짐작했습니다. 싫어하는 게 뻔히 보이는 사람이 이 계약서에 대해 설명을 듣고도 여기 있다는 게 이상하긴 했는데..."

솔직히 그 정도면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하는 게 맞지 않아요? 안 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뜬 사와무라가 악의 없이 물었다. 사인을 누가했든 내용을 제의한 사람은 사와무라일 것이다. 미유키는 욕을 삼키며 미안하지만 이대로는 못한다고 말했다.

"저도 미안하지만 못 들어줍니다. 왜 미유키선수에게 바로 연락을 안 하고 둘러서 찾아왔겠어요."

순진하게만 보였던 얼굴 위에 여우 귀라도 보이는 것 같았다. 미유키는 진심을 담아 미친 거 아니냐, 나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사와무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팬임다! 하고 말했다.

, 그 놈의 팬. 팬이라서 달라붙고, 팬이라서 욕을 하고, 팬이니까 멋대로 기대하고, 선망하고, 환상을 가지다 떨어져나간다. 미유키는 6년의 프로 생활을 거치며 많이도 데였다.

"도대체 뭐가 팬이냐, 좋아한다는 핑계로 사람을 괴롭히는 거?"

미유키는 이미 던져버린 예의를 주워들 마음이 없었다. 빈정거리는 미유키를 사와무라는 반짝이는 눈으로 보고 있어 욕지기가 솟았다.

"이딴 거 안할 거다. 위약금, 그게 얼만지 모르겠지만 몇 배든 줄 테니까 당장 꺼져."

"정말요?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경우, 미유키 카즈야의 이번 시즌 경기 출전권은 사와무라 에이준이 갖는다. 뒷장 읽어보신 거 맞죠? 거기에 동의한 겁니다? 이번 시즌 쉬고 싶으셨구나."

조잘대는 저 입을 주먹으로 쳐주고 싶은 충동에 힘이 들어갔다. 사와무라는 눈치는 있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이런, 조건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턱턱 터져 나왔다. 사와무라가 눈치를 살피며 그러니까 찍히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고 중얼거렸다. 째려보자 금세 입을 닫는다.

"너 정말 팬 맞아? 안티가 아니고?"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처음엔 약간, 아주 약~간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완전 팬입니다!"

, 그래. 차게 식은 미유키의 눈을 받고서 사와무라는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아 벌떡 일어나 손을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저기, 그것이 다 사정이 있어서.

"네가 내 팬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으니까. 일단, 그래서 어떻게 하면 페널티 없이 해지해 줄 건데?"

"그냥 진짜 얌전히 찍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포즈 같은 거 잡으실 필요 없거든요? 제가 알아서 쫓아다니면서 조용히 찍을게요! 그건 보증합니다."

"그게 더 소름 돋아."

단호한 거절에 사와무라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주변을 훑는 눈동자가 영 불안해 보였지만 미유키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신경 쓰면 지는 거다. 라고 되뇌고 있었더니 사와무라가 한 발 물러섰다.

", 그럼 거부권은 드리겠습니다."

"무슨 거부권?"

"전시회에 전시할 사진에 대한 거부권요. 전부는 안 되고 으음, 한 번 정도?"

"다섯 번."

"! 말도 안 돼! 보름 만에 찍히기 싫어하는 사람한테서 좋은 표정 많이 안 나온단 말입니다. 협조도 안 해줄 거면서!"

"싫으면 말지?"

당당한 미유키의 태도에 사와무라는 더 큰 패를 쥐고 있는 게 자신이라는 것을 잊은 듯 보였다. 안 되는데,를 몇 번 중얼거리던 사와무라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저랑 내기 하나 합시다!"

"갑자기 웬 내기야?"

"앞으로 보름 안에 제가 찍은 사진 중에, 진짜로, 솔직하게, 앙심에 손을 얹고! 잘 찍었다! 라거나 이런 얼굴 했었나, 라거나 이거 나 맞나, 하는 어쨌든 그러니까 제 작품에 대한 감탄이 나오면 거부권은 없는 겁니다. 대신,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들고 제가 귀찮았다고만 생각이 드시면 포기하겠습니다. 다섯 번이 아니고 찍은 사진 전부."

이득이 하나 없는 내기였다. 심지어 말도 틀렸다.

앙심이 아니고 양심이겠지.’

계약서의 말도 안 되는 조건 따위, 아무리 구단주라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이 못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넣은 조건일 것이다. 지금 팀에서 주전 포수인 미유키가 이탈하면 손해 보는 것은 구단이었으니 그대로 실행될 리 없었다.

그럼에도 사와무라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미유키는 그와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사와무라는 더 이상 순진해 보이지 않았고 떨고 있지도 않았다. 제 능력에 대한 믿음과 자신으로 강하게 불타오르는 눈이 가늘게 휘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유키는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미유키는 딱 일 분만에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사와무라가 자! 이제 가죠! 하고 외쳤기 때문이었다. 어딜? 이라고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미유키 선수 집이죠! ! 저희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전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미유키 선수는 본인 집이 더 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작업 도구야 부족하겠지만 모델인 미유키 선수가 편한 곳이 좋은 사진이 나오기 좋거든요.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 법! 이 사와무라 에이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해내는 남자입니다!

또 무언가의 스위치가 켜졌는지 사와무라는 미유키에게 말하는 건지 혼자 중얼거리는 건지 모를 속도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유키가 팔랑팔랑 움직이는 사와무라의 목덜미를 잡아 제자리로 돌리며 그게 아니고, 라고 말했다. 씨익 웃는 얼굴과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걸 알고도 일부러 헛소리나 했단 말이지, 미유키는 이를 악물었다.

하하하, 당연히 오늘부터 보름동안 24시간 따라다니려면 같은 곳에 머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집도 넓으실 텐데 방 하나만 빌려주세요.”

싫다면?”

계약 위반으로 한동안 푹 쉬시는 거죠.”

이야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미 시작한 이상 무를 수 없는 조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괜히 오기를 부려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기엔 자존심이 있었다.

흐음? 하루 종일 따라다닌다면서 방은 따로 써도 되는 건가? 여유롭네.”

“??..... !!?! , 무슨 소릴!! 당연히 빌리는 방은 카메라와 작업을 위한 방이 아니겠습니까! 잘 때도 씻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 염려마시죠!”

도끼눈이 되어 그렇게 외친 사와무라는 곧 아, 아니, 아니죠. 여유만만입니다! 하지만 호랑이는 쥐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 최고의 사진을 보여드리려면 어쩔 수 없네요. 하고 말을 바꿨다. 역시 아차하는 마음에 역시 자신이 없는 거지? 하고 거리를 두려했던 미유키의 말이 나오기 전이었다.

최대한 협조하실 거라는 기대는 안하겠지만 방해는 진짜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사내라면, 정정당당하게! 아시죠?”

쐐기를 박는 사와무라의 말에 미유키는 입만 벙긋거리다 가방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도 이 시끄러운 녀석을 피할 곳이 없다는 현실에 참을 수 없이 우울해졌다.

 

반강제로 미유키의 집에 머무는 것을 허락받은 사와무라는 보통 이상의 크기를 가진 아파트로 들어가는 미유키의 차 안에서 조금 안도했다. 프로선수로 제법 생활한 만큼 돈이야 벌었겠지만, 버는 것과 어디에 쓰느냐는 사람마다 달랐다.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들로 교통편도 괜찮고 상가도 근처에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차도 잘나가는 프로선수답게 비싼 외제차였고, 생각보다는 생활에 신경을 쓰는 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네.’

조심히 미유키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사와무라는 차안에서 했던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넓고 전망 좋은 집은 깔끔하고 깨끗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거실에는 테이블과 큰 벽걸이TV와 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이곳저곳 신세 진 경험이 많은 사와무라는 미유키가 이 집에 애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집이 아니고 잠자는 공간, 옷 갈아입는 공간, 야구 경기 모니터링 하는 공간, 밥 해먹는 공간이구만.’

도쿄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부모님과 같이 안사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런 사적인 것을 물어볼 시점이 아니었다. 사와무라는 나중에 꼭 물어보겠다고 다짐했다. 미유키는 두리번거리며 서있는 사와무라에게 방 하나 달라고 했지? 저 방 쓰면 돼.” 하고 말을 던져두고는 입구와 가까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옷이라도 갈아입는 모양이지. 사와무라는 미련 없이 미유키가 가리킨 방으로 향했다.

이것은 또, 생각 외로...’

방 안의 풍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손님방일 것으로 추정되는 방이 오히려 생활감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침대가 없는 대신 푹신한 이불이 깔려 있었는데, 단체로 머물다 갔는지 베개 서너 개가 마음대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벽과 기대진 베개 옆으로 만화책이 쌓여 있었고, 방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것은 장기판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게임시디가 들어있는 곽이 밟혔다.

문 하나로 성격이 너무 달라 사와무라는 문고리를 잡고 거실과 방 안을 몇 번이고 번갈아봤다. 그 때 미유키가 문을 열고 나왔다. 사와무라의 짐작대로 옷 방이 맞았는지 편한 민소매와 반바지 차림이었다. 아직도 방 입구에 서있는 사와무라에게 미유키가 의문이 섞인 시선을 던졌다.

이거 참...”

무슨 문제라도 있어?”

큰 문제가요.”

“? 뭔데?”

저 남자 알몸 같은 거 관심 없는 편인데, 미유키 선수 근육이 참 멋있으시네요. 누드모델에는 관심 없으십니까?”

방에 대한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헐렁한 민소매 티 사이로 언뜻 보이는 속살이 딱 달라붙는 이너셔츠와는 다른 느낌을 주어 재밌었다. 역시 다 벗고 있는 것보다는 살짝 보이는 게 맛이... 입맛을 다시던 사와무라는 차게 식다 못해 얼어붙을 것 같은 미유키의 표정에 정신을 차렸다. 실언이었습니다. 라고 고개를 숙이자 미유키는 멀찍이 돌아 부엌으로 향했다. 경멸이 섞인 표정은 그대로였다. 지금 찍으면 혼나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찍었다간 진짜로 쫓겨날 것 같았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미유키가 알았다면 당장 계약이고 뭐고 쫓겨났을 생각을 하며 사와무라는 짐을 풀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왠지 모르게 시끄러울 거라 예상했던 사와무라와의 생활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첫날 미유키가 준비한 저녁을 먹을 때만해도 진짜로 당신이 만든 겁니까? 의외네요! , 맛있다는 소립니다. 매일 해주실 건가요? 저 왠지 식비가 아니라 요리 값을 내야할 것 같습니다. 따위의 말들을 주절거렸던 사와무라는 이제부터는 집중하겠다는 웃긴 말을 남기고 정말로 입을 닫았다.

지금부터 하겠습니다. 저한테 신경 쓰지 마시고 평소처럼 생활하세요."

그런 말을 들어도 낯선 사람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유키는 어느 순간 사와무라의 존재를 잊어버릴 뻔 했다. 의식하지 않으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을 만큼 존재감이 옅어졌던 것이다.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넓기만 넓은 미유키의 집은 사와무라의 존재를 조용하게 숨겨주었다. 하지만 미유키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시선이 집요하게 쫓아왔다. 그런 식으로 알게 되는 사와무라의 위치는 매번 달랐다. 자기의 몸을 움직일 때는 나타나지 않는 기척이 미유키가 움직일 때면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이 소름 돋았지만, 그 시선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보고 있다는 느낌을 그렇게 강하게 전달하면서도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상도 없는 느낌이었다. 미유키는 천천히 사와무라의 고요함에 익숙해져갔다.

사와무라는 보름 중 3일 정도를 아무말 없이 따라다니기만 했다. 목에는 카메라를 걸고 있었지만 그것이 미유키를 향하는 일은 없었다. 미유키가 모르는 사이에 찍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겠지만 찍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 기간 동안 사와무라가 의식적으로 미유키의 시야에 들어오는 시간은 잘 때, 밥 먹을 때, 이동하기 위해 차를 탔을 때뿐이었다. 물론 미유키에게 안 보인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못 보게 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마다 구구절절한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미유키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유키의 사진을 찍기 위해 쫓아다니는 사진사'로 사와무라를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사와무라는 카메라를 들었다. 사와무라가 그날 찍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은 역전 홈런을 치고 루를 도는 미유키의 등이었다.

 

그 다음 날부터 사와무라는 엄청난 속도로 사진을 찍어댔다. 가만히 있었던 시간을 만회할 심산처럼 보였다. 하루 만에 귀에서 셔터소리가 떠나지 않아 환청을 듣는 건지 진짜로 찍히고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찍혔다. 미유키가 불만을 표시하자 그러면 셔터 음을 없애겠다고 답했다. 당연하겠지만 찍지 않겠다는 말은 없었다.

미유키선수라면 언제 찍히는지 모르는 걸 더 싫어할 것 같았거든요.”

카메라를 조작하며 사와무라는 그렇게 말했다. 소리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미유키는 그게 무슨 말이냐 말했지만 금방 사와무라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메라는 여전히 저를 향하고 있었지만 소리가 나지 않으니 불안함에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아닌 척 하면서도 연신 카메라를 쳐다보는 미유키를 보다 못해 사와무라는 소리를 켜놓고 덜 찍겠다고 말했다. 다시 시작된 셔터 소리는 확실히 처음보단 줄어있었다. 마음이 놓일 지경까지 되어 미유키는 차츰 신경을 쓰지 않게 됐다. 어느 순간 셔터 소리를 없앤 사와무라가 끊임없이 카메라를 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참 후였다. 단지 그것을 위해 3일을 할애한 사와무라에게는 뿌듯한 성과였다.

 

5일쯤 됐을 때부터 사와무라는 미유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던 때처럼 자기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미유키의 대답이 필요한 질문위주였다. 무슨 반찬을 제일 좋아하느냐 같은 아주 사소한 질문, 그것도 밥을 먹는 중이었으니 미유키는 사와무라가 입을 열었다는 이상함도 느끼지 못하고 가리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세 시간에 한 마디 할까 말까 했는데, 점점 몸을 숨기는 시간도 줄어들더니 어느새 바로 옆에서 대놓고 물어보고 찍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총 일주일이 걸렸다.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완벽하게 사와무라에게 적응되어버린 것이다. 쿠라모치가 지적하기 전까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미유키의 좁은 인간관계 중에서 그나마 제일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의 존재를 가장 늦게 알게 된 사람이기도 했다.

저거 뭐냐?”

다소 불량한 말투로 쿠라모치는 사와무라를 손가락질 했다. 굵은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멀리 자리 잡은 사와무라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고등학교 때 친구라는 말에 짧은 인사만 건네고 멀리 자리한 사와무라는 아무런 음료도 시키지 않고 미유키만 쳐다보고 있었다. ‘기다려명령을 받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라 미유키는 슬쩍 웃었다. 쿠라모치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지었다. 마주 손을 흔들어준 미유키는 쿠라모치에게 뭐냐니, 사와무라라고. 사진, 아니 포토그래퍼.”라고 설명했다. 방금 전에 사와무라와 통성명했으면서, 라는 한심한 표정을 짓자 쿠라모치가 울컥한 듯 그게 아니고! 하고 외쳤다. 제가 낸 큰 목소리에 움찔해서 사와무라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영락없이 뒷담 하는 사람의 모습이라 미유키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러는데?”

"왜 그러는데에에????"

말꼬리를 잡아 늘리는 모습이 정말로 모르는 건지 비꼬는 모양새라 미유키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짐작 가는 것이 없어 고개를 갸우뚱하자 쿠라모치는 입을 막았다. "토할 것 같으니까 하지마라." 진지한 목소리였다. 작게 셔터 소리를 포착한 미유키는 뭐, 그래도 사와무라는 좋다고 찍고 있는 걸, 하는 생각이 들어 웃었다. 쿠라모치는 진심으로 미유키가 어디 아프기라도 한 줄 알았다.

"야이씨. 미유키 카즈야가 처음 보는 사람을 금붕어 똥마냥 달고 다니는데, 내가 왜 그러냐고 안 묻게 생겼냐?"

"핫하하, 금붕어 똥이라니""말꼬리 잡지 말고. 그래서 저거 진짜 뭔데."

더 이상 장난을 받아줄 것 같지 않았다. 제대로 설명해주려던 미유키는 말을 고르다 멈췄다. 이상했다. 그제야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챈 것조차 이상했다. 사와무라 에이준과 미유키 카즈야의 관계란 만난 지 겨우 8일이 된 모델과 사진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좀 더 부연 설명을 하려해도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지 못하면 그동안 찍은 사진 전부 포기하겠다는 내기로 시작된 관계라는 것 말고는 붙일 말이 없었다. 그것으로는 미유키 카즈야가 싫어하는 사진사를, 처음 보는 사람을 8일 동안 바로 옆에 두고 다녔다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 이런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꿈에서 깨어났다고 하는 편이 좋을까, 콩깍지가 벗겨졌다는 말도 괜찮을 것이다. 미유키는 찰나의 순간 세계가 바뀌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나 지금 무슨 표정이지? 사와무라는 지금도 나를 찍고 있는 건가?'

겨우 머리가 돌아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멀리서 찰칵, 하고 카메라 소리가 났다. 쿠라모치가 괜찮냐고 말을 걸어오는 것을 알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찰칵. 천천히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길게 셔터소리가 이어졌다. 눈이 마주쳤다. 사와무라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쿠라모치와는 그 자리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다음에 말해줄게. 7일 후에 보자. 하고 정확한 날짜까지 말하는 미유키를 쿠라모치는 찝찝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걸려던 것 같았지만 듣지 않고 일어났다. 미유키가 움직이자 사와무라도 아무 말 없이 따라왔다. 조금 굳은 표정이었지만 카메라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꿋꿋하게 사진을 찍을 거라면 모르는 척 말도 걸면 좋을 텐데, 미유키는 잠시 생각을 멈췄다.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지금까지 어디서도 말한 적 없는 부모님의 얘기나 제일 존경하는 포수, 타키가와의 이름까지 꺼냈던 자신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특히 크리스에 대해 말하게 된 경위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어이없었다. 크리스는 미유키에게 십년은 족히 넘은 어린 시절부터 이기고 싶었던 상대였다. 결국 이기지도 아니 싸우지도 못하고 헤어져 다시 만날 기회가 요원해진 선배이기도 했다. 재활을 위해 졸업 후에 해외로 떠났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했으니 언젠가 길이 겹칠 때도 있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미유키는 지금까지 인터뷰에서 예의상 말하던 선배 선수 이름 대신 크리스라는 이름을 꺼냈을 때 사와무라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렸다. 뜬금없이 꺼낸 이야기였으니 어이가 없기도 했겠지. 미유키는 지난 며칠 간 늘어놓은 헛소리 목록을 떠올리다 제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지금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이 후회인지 분노인지 상실인지 경각심인지 초조함인지도 모르게 되어, 미유키는 사와무라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다음 날이 되어도 어색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기척을 없애지도 말을 걸지도 않고 그저 옆에 있었다.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긴 했지만 렌즈는 미유키를 향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공기에 주변 사람들이 더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싸웠다거나 싸우거나 싸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투수도 아니고 포수의 눈치를 보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헛기침을 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분위기를 깨트린 것은 눈치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오늘 미유키네와 싸우게 된 나루미야 메이였다. 고등학교 때의 배터리 하라다 마사토시를 쫓듯 니혼햄에 입단한 나루미야는 미유키와 시합하는 날이면 꼭 한 번씩 들려 속을 긁고 가곤 했던 것이다.

대형 폭풍의 등장에 다들 제발 오늘만은 그냥!!을 속으로 외치는 와중에 나루미야는 대번에 지뢰를 밟았다.

? 넌 뭐야? 기자야? 여기 들어와 있어도 돼?”

안녕하세요. 나루미야 선수 맞죠?”

사와무라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왼손을 내밀었다. 원래 왼손잡이였던 사와무라가 정신이 없어 습관적으로 내민 것이었지만 나루미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와무라를 훑어봤다.

뭐야? 나 알아? 하긴 스포츠 기자가 이 몸을 모를 리 없겠지. 근데 이 손이 좀 비싸서 아무나 만질 수 있는 손이 아니거든.”

밉살맞은 나루미야의 말투에도 사와무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싱글벙글 웃으며 그렇죠, 전국에 하나뿐인 왼손 아님까, 하고 대꾸했다. 딱히 비꼬는 말투도 아니었다. 나루미야는 저를 떠받들어주는 말을 하는 사와무라가 마음에 들었는지 금세 웃는 얼굴로 변했다. 사와무라가 어정쩡하게 내민 손을 거두려하자 나루미야가 손을 뻗었다. 팬인가 본데 한 번쯤 잡아주지 뭐, 라는 생각에서였다.

사와무라의 손이 빠르게 움직여 나루미야의 손을 피했다. , 하고 곳곳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중 하나는 사와무라의 것이었다. 등 뒤에서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 손도 비싼 손이거든? 기자도 아니고.”

아뇨, 저 왼손도 필요하긴 하지만 셔터 누르는 건 오른손인데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삼켰다. 나루미야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을 때만 해도 스코어북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던 미유키가 다가와 사와무라의 손을 잡아 끈 것이다. 그것도 하필 뒤에서, 미유키의 오른손으로, 사와무라의 왼손을 잡은 것이라 다분히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그 꼴을 정면으로 보게 된 나루미야가 입만 벙긋거리다 겨우 카즈야? 하고 미유키의 이름을 불렀다.

뭐 하러 왔냐, 나루미야.”

뭐 하러 긴, 늘 왔잖아? 뭘 새삼스럽게 묻고 그래.”

헛손질을 하게 된 왼손으로 괜히 손 부채질하며 나루미야는 뚱하게 대꾸했다. 본의는 아니지만 사이에 끼게 된 사와무라의 시선이 나루미야와 미유키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시합 전에 몸도 안 풀고 참 한가하다? 이번에도 우리가 이기겠네.”

하아? 무슨 소리야? 너네 저번에 마사상한테 홈런 두 방 얻어맞은 거 까먹었어?”

그리고 내가 쓰리런으로 역전하지 않았던가? 그거 누가 던진 거더라?”

참고로 두 사람이 얘기하는 저번 시합은 정말 개막장이다, 쟤네 어제 단체로 술 처먹었냐, 저거 야구 점수 맞냐, 등등 온갖 소리를 다 들으며 흑역사로 손꼽히고 있었다. , 크흡, 하고 커져가는 헛기침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은 유치한 말싸움을 이어갔다. 하나 둘씩 자리를 피하는 다른 선수들을 보며 사와무라도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적어도 자신은 놔주고 얘기하던가... 미유키가 손을 놔주기를 바라며 바스락거리던 사와무라는 나루미야가 다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누군데?”

, 인사가 늦었습니다. 사와무라 에이준이라고 합니다.”

팔이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상태로 사와무라는 고개를 숙이다 팔에 얼굴을 부딪쳤다. 미유키는 놔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대로 한 바퀴를 돌아 미유키의 오른편에 서면 적어도 안겨있는 모양에선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사와무라는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사와무라. 사와무라. 어디서 들어봤는데?”

나루미야는 몇 번이나 이름을 중얼거리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그거야? 이번에 AB 결혼할 때 웨딩사진 찍은 에이에이?”

A는 미국에 있는 일본 대사, B는 헐리우드 배우의 이름이었다. 나루미야를 따라 사와무라와 미유키의 눈도 동그래졌다. 사와무라는 나루미야가 그런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해서였고 미유키는 그건 또 뭐야?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 그런 일도 있었죠. A씨랑 친분이 있어서...”

우와, 진짜로? 우리 누나가 그 사진보고 엄청 부러워하더라고. 자기도 결혼할 때 그렇게 찍고 싶다고. 혹시 부탁해도 돼?”

유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아니면 자기도 그만큼은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나루미야가 넉살좋게 물어보고 사와무라 역시 넉살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팔이 불편한 와중에도 목에 걸린 카메라의 케이스에서 명함을 꺼내 오른팔로 건넸다. 물론이라며 별 일 없으면 해외에 있을 때가 아니면 시간 조정하면 된다는 친절한 말에 기분이 나빠진 것은 미유키였다. 그런 곳에 명함을 넣어두고 다니는 지도 몰랐고 아니 그것보다 연락처자체를 몰랐다. 자신은 7일 이후에 끊어질 인연인데 나루미야는 더 먼 미래를 이야기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유키에겐 핑계 댈 누나도 없었다. 손에 힘이 풀렸다.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눈치를 보며 어깨를 주물렀다.

나루미야는 미유키는 이제 안중에도 없는 듯 사와무라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나이는? 25입니다. 나보다 한 살 어리네. , 알고 있어요. 흠흠, 역시. 사진 찍은 지 얼마 안 됐어? 누나가 사진집 찾던데 없더라고. , 저 책은 아직. 전시회는 이번에 열기로 결정됐어요. 도록도 함께 나올 겁니다. ! 그래? 나중에 알려줘. 그러고 보니 여긴 왜 있는 거야? 카즈야랑 아는 사이?

뭔가 좋은 핑계는 없나, 명함은 카메라 케이스마다 들어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미유키가 귀를 쫑긋 세웠다. 사와무라는 아무런 주저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 모델입니다.”

딱 잘라버리는 말에 기분이 상했다. 나루미야가 폭소를 터트려 더 기분이 나빠졌다. 나루미야는 호흡과 웃음이 일체가 된 듯 배를 부여잡고 웃다가 겨우 카즈야가 모델이라니, 내가 더 낫지 않아? 하고 말했다. 웃음소리가 섞이긴 했지만 못 알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사와무라는 어색하게 하하하, 하고 따라 웃더니 그건 아니네요.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말 하나하나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오가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지만, 미유키는 슬며시 웃었다.

뭐야?? 사내놈이 같은 사내놈 얼굴보고 반한 것도 아닐 거고. 내 얼굴도 나쁘지 않잖아? 잘생겼잖아?! 이 끝내주는 어깨! 잘빠진 다리! 어디가 부족한데?!?”

그래봤자 유니폼 차림이었지만, 나루미야는 옷이라도 벗어 던질 기세로 어필했다. 사와무라는 쩔쩔매며 달래보려 노력했다. 아니, 나루미야 선수가 못 생겼다는 게 아니라, 물론 잘생기셨죠! 일본제일! 아니 우주미남! 근데 저기 미유키 선수가 도전 정신이 불타오른다고 해야 할까요. 나루미야 선수는 그 사진도 이곳저곳에서 찍히시고 팬서비스도 많으신데 미유키선수는 개인 사진도 찾기도 힘들고, 그게 그래서,

횡설수설하는 사와무라에게 입을 삐죽 내민 나루미야가 나도 찍어줘 하고 졸랐다. 미유키는 끈질긴 나루미야를 달래기 위해서 사와무라가 대충이라도 찍어주고 끝낼 거라 생각했다. 사와무라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건 안 되겠다고 말했다.

미유키 선수와 함께라도 괜찮으시다면...” 하고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나루미야는 더 날카로워진 눈으로 더 싫어, 라고 대꾸했다. 그러시겠죠. 짐작하고 있었는지 체념이 담긴 목소리였다.

죄송하지만, 저 작품 하나 찍을 땐 그거 외엔 안 찍습니다. 앞으로 6일 동안 미유키 선수가 없는 사진은 찍지 않겠다는 내용이 계약서에도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사와무라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말투로 거절하자 나루미야는 그게 뭐냐고 투덜거릴 뿐 포기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런 조항이 있다는 것은 미유키도 처음 알았다. 중간정도까지 읽다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구겨버렸으니 뒤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알 리가 없다.

괜찮지 않아?”

문득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사와무라가 강경하게 거절하고 있던 탓이 컸다. 사와무라가 고양이 눈을 뜨고 미유키를 노려봤다. 나루미야는 분위기파악도 안하고 역시 카즈야! 라며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계약 날짜 때문이라면 하루 더 늘려줄게. 여기서 대충 찍을 거 아니지? 반나절 정도 다녀와.”

그렇게 한 번 더 권했다. 계약 날짜가 문제가 아니고 작품을 위해서라고 거절하리라 생각했다. 대답이 나오기 까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길게 느껴졌다. 사와무라는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미유키 선수가 그렇게 말하신다면... 그럴까요.”

아니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라는 당황을 표출하기도 전에 사와무라가 카메라 가방을 챙겨들고 나루미야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다른 팀원들도 떠나버린 방에서 미유키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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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ㅅㅇ~ 쓰는 중~

2015년 8월 22일 미사와 배포전 '홈플레이트'에서 나오는 소설본 '그 ____의 이야기' 수량조사 페이지입니다.

아직 퇴고 전입니다만, 페이지가 드디어 확정되어 간단하게라도 수량조사를 위해 홍보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기간이 짧아 선입금은 받지 않고, 수량조사분+소량만 가져갈 계획입니다.



* 수량 조사 기간 : ~ 18일(화) 6시까지

* 수량 조사 방법 : 덧글로 [닉네임 / 수량] 남겨주세요.

  여유가 된다면 수량조사 해주신 분들 대상으로 4p 정도의 일화를 동봉할 예정입니다.

* 부스 위치 : 트6b [안개주의보]

* 책 사양 : A5 / 전연령 / 떡제본 / 52p(예정) / 5,000원(예정)

* 줄거리 : 중3 가을 세이도고교에 견학오지 못하고 교통사고 당한 사와무라는 영혼상태로 미유키와 만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고 자신에 대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인간처럼 보이는 미유키를 따라다니는 사와무라. 그런 사와무라를 어느 날부터 볼 수 있게 된 미유키의 이야기.

* 주의사항 : 본의아니게 사와무라라는 이름이 절반을 넘어갈 때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사와입니다.


* 샘플 *

(퇴고 전입니다. 오자와 문장이 일부 수정될 수는 있으나 기본 편집은 유지될 예정입니다.)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통판 계획은 없습니다.

문의사항 있으시면 @yeonmoo_로 멘션 주세요.

 

 

행사이름을 홈플레이드로 오타낸 걸 이제야 발견하다니ㅠㅠㅠ;

수량조사 종료합니다! 응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행사장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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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조사해주신 분들 + 1시 전까지 찾으러 와주시는 분들께 4p 외전 미유키 카즈야의 고백 이 증정됩니다.

혹시 시간이 맞지 않으실 것 같은 분들은 위의 트위터나 덧글로 말씀해주시면 남겨놓겠습니다.


"그만 봐라. 티난다, 야."
친구보다는 동료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쿠라모치의 조언을 빙자한 핀잔에도 미유키는 사와무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흔하지않은 미유키의 순수한 미소가 괜히 배알이 꼴려 쿠라모치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좋냐? 답을 바라고 던진 물음은 아니었는데, 미유키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좋아' 라고 말했다.
전날 밤 미유키는 사와무라와 연인이 되었다. 짝사랑 상대였던 사와무라의 고백에 의해서 였다.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라 오히려 꿈인가, 하는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고시엔 진출이 확정된 겨울'이라는 상황이 아니라 같은 남자이기 때문에 조용히 묻어둔 마음이었다. 스스로도 잊었다 생각할 만큼 깊숙히 잠들어 있던 연심은 사와무라의 한 마디에 폭발하듯 끓어올랐다. 거절을 예상하며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와무라는 미유키 앞에 당당히 서있었다. 마운드가 아닌 곳에서, 미트가 아닌 미유키 카즈야를 똑바로 쳐다보던 뜨거운 눈빛이 새삼 미유키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글거리던 눈빛이 물기를 머금는 모습까지 보고서야 미유키는 사와무라에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게 이어진 침묵에 도망가버린 사와무라를 천천히 뒤쫓으며 미유키는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막고 표정관리를 했다. 그라운드를 두 바퀴 돈 덕분인지 미유키는 제법 어른스럽게 대답을 돌려줄 수 있었다. 발그레진 얼굴로 작게 웃던 사와무라가 아직도 눈에 선해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와하하, 하고 크게 웃던 사와무라가 문득 고개를 쑥 빼서 주위를 살폈다. 구부정하게 턱을 괴고 있던 미유키의 자세도 따라 쭉 올라갔다. 마침내 둘의 눈이 마주쳤다. 평소처럼 팔을 쭉 뻗어 머리 위로 크게 흔드는 사와무라의 얼굴에는 수줍음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는 것만 같았다. 연인인 자신에게만 보여줄 표정이라 생각하니 귀여워서 참을 수 없었지만 미유키는 책상 아래로 주먹을 꽉 쥐며 남은 한 손으로 가볍게 인사했다. 지금 막 발견한 것 같은 능청스러운 손짓이었다. 얼씨구, 하는 쿠라모치의 추임새가 들렸지만 미유키는 신경쓰지 않았다.
조심스럽고 서툰 첫 사랑, 그리고 첫 연애였다.

남들에게 당당히 말할 수 없는 둘의 연애는 조용하게 이어졌다. 금방 말실수를 하거나 수상한 몸짓을 보여 의심을 살거라 생각했던 사와무라는 미유키가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정도를 지킨 덕분이었다. 만약의 일이 일어났을 경우 이번에야말로 먼저 당당하게 둘의 사이를 인정하려했던 미유키에겐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한편으론 그만큼 이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거라 생각되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와무라만 생각하면 심장이 날뛰고 얼굴이 붉어져 하루에도 몇 번씩 심호흡을 해야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와무라도 이럴까 하고 생각하면 심호흡으로도 진정되지 않을만큼 달아올라 곤란해지곤 했다.
여유시간이 없는 탓도 있었다. 둘의 스케줄은 눈을 뜰때부터 감을 때까지 야구 이외의 일은 생각할 수 없을만큼 팍팍하게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주장이라는 자리에 있어 남들보다 더 바쁜 미유키와 자타공인 연습벌레 사와무라가 둘 만의 시간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야구에서 특별한 관계로 불리는 밧데리였기 때문에 붙어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미유키는 주전포수였고 사와무라는 아직 에이스가 아니었다. 공식 연습시간에 사와무라와 붙어있으면 있을 수록 사와무라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미유키는 잘 알았다. 일부러 후루야를 우선하고, 한참을 조르는 사와무라의 말을 억지로 들어준다는 듯이 저녁 연습을 함께 했다. 가만히 놔두면 오버워크하니까 지켜본다는 핑계는 다른 부원들에게는 충분히 납득가는 이유였다.
가끔은 사와무라가 실수를 하는 것보다 미유키가 주장으로서 중도를 지키는 게 더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언제나 생각에서 그쳐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연인이기 이전에 포수이자 선배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와무라가 최종적으로 어떤 투수가 될지 제일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그였기때문에 더욱 그랬다. 마운드 위에서 진정하지 못하는 사와무라에게 독한 말을 내뱉을 때는 항상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말리거나 위로의 말을 건네는 다른 녀석들을 보며 제 자리를 뺏긴 기분에 남모르게 질투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속을 태웠다. 
미유키는 그런 날이면 꼭 사와무라를 불러냈다. 시간은 항상 모두 잠들었을 한밤중이었다. 가장 오랜 이닝을 소화하는 만큼 피로를 풀어줘야 한다고 늘 말해왔지만 어느샌가 그는 항상 한 입으로 두말을 하고 있었다. 쑥스러워하며 조심히 불러냈던 애인 미유키가 사라지고 포수 미유키가 되어 안 자고 왜 나왔느냐 잔소리하면 사와무라는 다 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애인이 부르는 데, 사나이 된 자로서 어찌 잠만 자고 있겠음까!' 하고 큰 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피곤함이 가득 쌓인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사와무라에게 미유키는 쩌렁쩌렁한 그 목소리를 핀잔 주는 대신 가만히 그의 어깨를 만져주었다. 사와무라가 주인의 손이 닿은 고양이마냥 가늘어진 눈으로 긴장을 푸는 것이 손 끝에서 느껴질 때가 미유키의 피로도 풀리는 시간이었다. 미유키는 천천히 손을 움직이며 조심스럽게 낮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당시의 상황, 그 때 사와무라의 상태, 마음가짐, 그 때 왜 그런 말을 했는 지, 본심이 아니었다는 진심을 헛기침과 함께 털어놓아도 사와무라는 듣는지 마는지 대꾸가 없었다. 듣고있냐고 재촉하면, '미유키 안마 진짜 잘함다.' 한숨과도 같은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힘을 쭉 빼는 한편 뿌듯하게 만들었다. 미유키는 괜히 퉁명스레 '선배가 말하는 데 듣지도 않고, 하늘같은 선배한테 안마심부름이나 시키고' 하고 말하곤 했다. 정확히 따져보면 사와무라가 미유키에게 안마를 해달라고 시키지도 조르지도 않았으니 그 말엔 어폐가 있다. 하지만 사와무라는 그 점을 지적하는 대신 '선배가 아니고 애인이니까 괜찮슴다'하고 씩 돌아보며 웃어보였다. 분한 마음에 괜히 '말은 잘해'라고 말하면 '그래서 싫슴까?'하고 되물어 미유키는 할말을 잃었다. 꾹 다물어버린 입 대신 고개만 절레절레 젓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 사와무라는 '나도 좋아함다.'하고 말했다.
사와무라는 이렇게 단 둘이 있을 때면 가볍게 사랑을 전하곤 했다. 행여나 입 밖으로 꺼내면 날아갈까, 사라질까, 사와무라가 제 마음과는 다른 것 같다, 착각이었다 말할까봐 동의의 말도 하지 못하는 미유키와는 달랐다. 그래서 일까, 미유키는 사와무라가 마음을 전하면 전할 수록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제 속의 감정이 사와무라의 것보다 무겁고 질척거리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해맑게 웃고있는 사와무라를 붙잡고 제 앞에서만 웃으라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도 몇 십번, 미유키는 진짜 속마음은 감추기로 마음먹었다. 어려움은 없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사와무라의 가벼운 사랑에 고개를 끄덕여주면 되었으니까.
제 연인은 담아두고 있기엔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조금씩 흘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비어가는 마음을 채워주지도 않고서.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는 생활이었다. 스치듯 손을 만지고, 늘어가는 굳은살에 뿌듯해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 구속이 올라 기뻐하는, 남 모르는 연애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사와무라와 함께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여름이 생각보다 이르게 끝나고,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무슨 말이냐고 묻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눈 앞이 깜깜해 사와무라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헤어지자고 했음다. 볼 수 있는 시간도 이제 별로 없고. 나도 이제 1년 밖에 안 남았고. 나 에이스가 되고 싶으니까. 더 이상 다른 데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어차피 당신 나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슴까. 아니, 하나 물어볼게요. 나 좋아했던 적은 있었음까?
하나 하나,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는 사와무라의 변명에 그래서? 그게 왜? 어째서? 라는 말 밖에 생각나지 않던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마지막 말에 말문이, 아니 숨이 막힌 듯 했다. 어째서 사와무라가 자신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좋아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냐고 물었다면 앞의 말과 함께 전부 농담이었구나 하고 웃어 넘길 수 있을 텐데, 겨우 돌아온 시야 속 사와무라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미유키는 문득 사와무라가 고백했던 날 밤을 떠올렸다. 뜨겁게 타오르던 눈빛은 어느새 차게 식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보지 못한 건지, 보지 않은 건지.... 미유키 카즈야. 하고 사와무라가 대답을 재촉하듯 이름을 불렀다. 미유키는 겨우 응. 하고 대답을 토해냈다.
미유키의 대답을 헤어짐에 대한 긍정으로 들은 것인지, 물음에 대한 답으로 받은 것인지, 불린 이름에 대한 대꾸로 생각한 것인지 미유키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사와무라는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안녕.' 하고 짧은 인사와 함께 떠났다.

확실히 은퇴한 3학년과 현역 선수는 만날 기회가 적었다. 어쩌다 한 번 마주칠 때마다 사와무라만 노려보고 있는 미유키와 달리 사와무라는 미유키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매일 사와무라가 부족해서 힘든 미유키와는 달리 사와무라는 평소와 똑같아 보였다. 이렇게 되니 미유키는 사와무라야 말로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줄곧 생각했던 것처럼 착각이었다 깨달아 괜히 그의 핑계를 대며 헤어진 게 아닌가하는 결론이 내려질 쯤에 미유키는 정말 한계에 몰려있었다.
점점 퀭해지는 얼굴로 쉬는 시간마다 쪽잠을 청하는 미유키를 쿠라모치는 정말로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내려다 보곤 했다. 방에 쳐들어와서 아무 말 없이 관절기를 쓰고 간 날도 있었고, 교실에 쳐들어와 그러니까, 있을, 진작, 으아아아아!!! 하고 몇 마디를 벙긋 거리다 말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날도 있었다. 최대한 끼어들고 싶지 않아보였던 쿠라모치가 입을 뗀 것은 미유키가 프로 입단을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팀의 성적과는 별개로 미유키는 제법 여러 구단에서 러브콜을 받았고, 제법 골라간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쟁쟁한 팀을 두고 미유키가 고민한 것은 구단의 연고지였다. 어떻게 알았는 지 쿠라모치는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와 가고 싶은 대로 가라고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몰라 뭐? 하고 되묻자, 인상을 팍 쓰고 협박이라도 하는 얼굴로 보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멱살을 움켜쥐었다.
'지금도 건물 하나 떨어졌다고 보면 얼마나 자주 본다고. 졸업하면 글렀어. 아니 지금도 이미 글렀어. 포기해. 정신을 차리던가 구질구질하게 붙잡고 늘어지던가 해. 미련 뚝뚝 남은 얼굴로 버려진 개처럼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내가 말 안하고 모르는 척 하려고 했는데 진짜 못 봐주겠다. 말 꺼낸김에 다 하겠는데 그러게 옆에 있을 때 잘했어야지. 그 놈 바보인 거 모르냐? 야구 할 때 쓰던 머리는 어디다 갖다 버렸어? 직구 정중앙만 던져대던 요령없는 놈을 그새 잊어?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말을 해줘야 애가 헛생각을 안하지, 임마!'
솔직히 쿠라모치가 하는 말의 절반은 알아 듣지 못했다. 어느 순간 사와무라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집중하려 했지만 미유키의 귀에 제대로 들어온 말은 마지막 뿐이었다. 사와무라가 헤어질 때 했던 말이 함께 떠올랐다. 좋아했던 적이 있었냐 묻는게 당연했다. 미유키는 한 번도 사와무라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전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그걸 몰라? 하는 억울한 마음이 동시에 솟아올랐지만 조금 전 들은 쿠라모치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 했다. 사와무라는 바보였다. 그리고 미유키 자신도 바보가 된 모양이었다.
'사와무라 좀 불러줘.' 내가 왜.' '도와준 김에 끝까지 좀 부탁해.'
징그러워 새꺄, 라고 쿠라모치는 타박을 주면서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2그라운드 입구. 퉁명스럽게 내놓은 짧은 말이었지만 미유키는 오랜만에 해맑게 웃었다. 표정 관리를 할 생각따윈 이제 없었다. 얼굴이 보이면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서툴기 그지없는 자신의 밑바닥까지 보여줄 생각이었다.
변함없이 서툰 첫 사랑이었지만, 상대를 위한 두 번째 연애가 시작될 순간이었다.

-

내가 서툴고 불안해 보였나요
그건 내가 진심이었단 증거입니다
소중하지 않았다면
왜 그토록 마음을 기울였겠어요
망설이고 비틀거리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황경신 - 밤 열한시

라는 시를 보고 문득 생각나서 쓰기 시작했는데 속도가 너무 느려서 결국 쓰고 싶었던 사와무라와 미유키의 말다툼(?)은 못쓰고 여기서 끝... 나중에 시간이 나면 추가해야지.


 

 

미유키 카즈야가 뛰쳐나가다시피 구장을 빠져나갔다. 팬들에게 상냥하다 널리 알려져 있는 그가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이 쌩하니 지나치는 광경은 오랜 팬들조차 처음보는 것이었다. 주변의 소음은 그대로인데 남겨진 공간만이 싸늘했다.

“방금, 미유키 카즈야 맞...죠?”

한 팬의 누굴 향한 건지 모를 질문에 함께 버림받은 처지가 된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점 상황에서 13회 연장까지 갔지만 결국 본인, 미유키의 2점짜리 홈런으로 승리한 경기였다. 기분이 나빴을 리도 없었고, 이전에 처참하게 패한 후에도 웃으며 응원와줘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던 사람이었다. 적막을 깨트리고 새파랗게 질렸더라, 하고 누군가 말을 꺼냈다.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면서 마치 자신을 세뇌라도 할 것처럼 얼굴이 새파랗더라 하고 한 번 더 반복해서 말했다. 그 뒤를 이어 맞다, 얼굴이 창백하더라, 수심이 가득했다, 등의 누굴 위한 건지 모를 변명들이 이어졌다. 뭔가 아주 중대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지도 모르지, 하고 겨우 납득갈만한 상황을 만들어낸 팬들은 크게 다치지 않으셨다면 좋겠네요. 하고 마음을 모아 기도를 하며 헤어졌다.

팀의 간판인 미남 포수가 애인 생일 축하에 늦어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별로 기대 안함다. 이기고나 오십쇼!’

‘무슨 소리야. 이기는 건 당연한 거고, 이번엔 꼭 같이 축하할 거야. 케익 먹지 말고 기다려.’

‘단 거 못 먹는 사람이 웬 욕심임까. ...뭐, 일단은 기다리겠지만, 빨리 오겠다고 지고 오면 안됨다. 지면 문 안 열어줄거야. 알겠슴까?’

‘하핫, 여기 ㄴ, 우리 집이거든.’

내가 일부러 질 사람으로 보이냐, 그렇게 신뢰도가 없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꾹 눌러 참았던 아침의 대화가 자꾸만 미유키의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그간 저지른 일들이 있으니 신뢰도가 바닥인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올해야 말로 하고 벼르고 벼렸었는데... 또 한 번 시계를 확인하자 미유키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사와무라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미유키는 올해 연봉 협상 당시 연봉 오르고 내리는 건 상관없으니 5월 15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프를 달라는 요청을 했었다. 웬 떡이냐, 라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관계자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당당히 애인 생일이라고 밝히자, 물어본 주제에 관심없다는 얼굴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들키지나 말라는 잔소리와 함께 계약서에 당당히 ‘5월 15일은 경기에 나가지 않는다.’ 라는 항목을 추가할 수 있었다.

세상 만사 기대대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5월 15일. 미유키의 팀은 과거 이나시로의 황금 배터리였던 하라다와 나루미야가 소속된 팀과 경기를 하게 되었다. 미유키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아. 그렇구나.’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들이 프로가 된 지도 이젠 한 손이 넘어간다. 나루미야나 하라다와도 수 십이 넘는 경기를 치렀고 이길 때도 있었고, 질 때도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경기였다. 미유키 카즈야에게만.

사람들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미유키는 그 두 사람이 올해 처음으로, 다시 한 번 같은 팀이 되었다는 사실을 놓쳤던 것이다. 심지어 지금 미유키의 팀에는 후루야가 있었다. 6, 7년 전 뜨거웠던 여름의 경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며 당연히 미유키와 후루야가 선발로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가득했다. 프로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nn년 여름의 완벽 재현 같은 기사를 발견했을 때도 미유키는 그냥 웃고 넘어갔다. 당연했다. 이나시로는 나루미야가 확고한 에이스의 자리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세이도는 후루야만의 팀이 아니었다. 그의 고교시절 이나시로와의 마지막 시합에서 에이스 넘버는 후루야가 달고 있었지만, 그 전 시합의 에이스는 사와무라였다. 둘은 그의 졸업 후에도 끝까지 에이스 넘버를 두고 싸웠으며 서로를 성장시켰다. 또 그 둘이 무턱대고 돌진할 수 있었던 것은 카와카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의 세이도를 완벽 재현하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다. 뭐, 나루미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잠깐 웃고 넘어갈 사건이라고 미유키는 생각했다.

 

어라, 위험할지도? 라는 경각심을 미유키에게 심어준 사람은 어찌보면 관계자 중 하나인 사와무라였다.

‘이거 진짬까? 우와, 하얀 머리랑 사토루녀석이랑 붙는검까?’

미유키가 한 번 보고 던져둔 신문을 주워온 사와무라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당연히 미유키 카즈야가 선발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로 이겨야함다! 하고 소리쳤다. 오프를 받았다는 말을 안했으니 사와무라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미유키는 기대에 가득찬 사와무라에게 그 날 자신은 쉴 것이라 차마 말하지 못했다.

사와무라의 반짝이는 얼굴이 미유키의 심장을 괴롭히고, 그의 눈치를 살피는 관계자의 비굴한 웃음이 비위를 건드리는 나날이 며칠간 이어졌다. 미유키가 사와무라에게 어떻게 사실을 밝힐까 고민하는 사이 15일 선발 멤버가 먼저 발표됐다. 당연히 미유키 카즈야의 이름은 빠져있었다. 제일 먼저 소식을 접한 후루야가 종이 한 장을 들고와서 불만을 표했다. 몇 년이 지나도 발전이 없는 의사표현이었다.

‘이거...’하고 말을 줄이는 후루야에게 미유키는 ‘미안, 그 날 사와무라 생일이잖냐. 좀 봐주라.’ 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사와무라와 미유키의 관계는 전 세이도 야구부원들에게는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다. 둘의 사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을 후루야였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납득해 준 모양이었다. 사와무라와 비슷한 야구바보인 후루야가 쉽게 넘어가서 였을까, 미유키는 사와무라도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기뻐할 지도 모르겠다고 조금 기대도 했다. 돌아가자 멱살을 잡히며 순식간에 사라진 희망이었다.

‘어디 다쳤음까?’

멱살을 쥐고 할 말은 아니겠지만,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전신을 빠르게 훑으며 물었다. 미유키는 사와무라가 어떤 순서를 거쳐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아 가볍게 웃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걱정했냐고 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소라면 얼굴이 벌게져서 아니라고 고래고래 소리쳤을 텐데, 사와무라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멀쩡한데 갑자기 왜 선발에서 빠진 검까! 뭔가의 음모임까?? 밉보였음까? 선배랑 또 싸웠음까? 사토루가 선발이던데 당신이 맘에 안든다고 땡깡을 부린 것도 아닐테고 대체 왜 빠진 거야!?’

참고로 밉보인 일도, 선배와 싸운 일도, 선발 투수가 미유키가 마음에 안든다고 불평해 경기에 나가지 못했던 적도 진짜로 있었다.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심호흡을 유도하며 전부 아니라고 말했다.

‘그 날 원래 쉬기로 했었어.’

히-히-후- 하고 용도가 틀린 호흡을 하던 사와무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미유키를 올려다 봤다. 원래라니 원래가 내가 아는 원래인가 다른 특별한 뜻이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이 말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미유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니 생일이잖아.’

동그랗던 눈이 더 커지더니 멱살을 붙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눈동자가 빛을 잃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그게. 나직이 흘러나온 낯선 목소리에 미유키는 당황했다.

‘우리 사귄 뒤로 한 번도 제대로 축하해준 적 없었잖아. 그래도 나 니 애인인데, 같이 살고 있는데. 회식때문에 강제로 붙들리고, 입원하고, 한 번은 아예 까먹었고, 원정 경기가고...’

미유키는 지난 사와무라의 생일들을 떠올렸다. 결국 작년 생일 파티는 미유키가 모르는 대학 동기들과 함께 했다. ‘선배님들이 바쁘시다니 불초 사와무라 에이준, 어찌 생떼를 쓰겠음까! 따로 찾아주시기로 했음다! 그러니까 미유키는 집에서 제일 먼저 축하해주십쇼.’하고 웃는 사와무라의 말을 그대로 믿을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쿠라모치로부터 료상이 나중에 두고보자더라, 라는 전언을 받았다. 이번에도 미유키가 바빠서 참석을 못할 것 같은데, 세이도OB가 전부 모이면 신경쓸테니 자신이 따로 찾아뵙겠다고 부탁했다는 얘기였다. 자기 자신과 야구만 아는 부부젤라같던 녀석의 변화가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를 생각해주는 마음씀씀이가 고맙지 않을리 없었다. 사랑받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자신은 제대로 돌려주고 있는가, 하는 자문을 한다면 아니다, 라는 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 생일인지.’

확실히. 서운해야 할 사람은 사와무라지 미유키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사와무라가 먼저 말해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사와무라가 알았다면 어이없을 생각을 하며 미유키는 조용히 사와무라의 말을 기다렸다.

‘카즈야. 생일 선물 주십쇼.’

눈가가 살짝 빨개진 사와무라가 고개를 들며 미유키를 불렀다. 부끄럽다고 둘만 있어도 자주 부르지도 않는 이름이었다. 뭔들 못들어주랴,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준다고 했음다? 하고 재확인한 사와무라는 예쁘게 웃었다.

‘홈런볼이 갖고 싶슴다. 하얀 머리가 던진 걸로.’


줄게. 너에게 승리도 함께 모두 안겨줄게.

지금 생각하면 닭살돋는 말이었다. 분위기를 탄 감이 강했지만 진심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겼고 나루미야에게서 홈런도 뽑아냈다. 억지를 부려 연장전까지 버티고 버텼으니 힘이 풀린 탓도 있겠지만, 홈런에 연연하다 일단 경기를 끝내고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휘두른 타이밍에 홈런이라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13회 말이었고, 공이 전광판을 맞춘 순간 경기는 끝이 났다. 경기장 관계자에게 공 좀 찾아달라 부탁을 해서 공을 받고 허겁지겁 제대로 씻지도 않고 차에 올랐다. 팬들에게 잘해주라던 구단의 권유 같은 명령도 잊은 채였다.

늦은 밤이었지만 금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차안에서 시계만 쳐다봤다. 견인해가도 큰소리 치지 못할만큼 처참한 모양새로 주차를 하고 가게 문을 연 시간은 딱 12시 정각을 넘긴 때였다.

사와무라의 생일이 끝났다. 점원에게 사와무라의 이름을 말해 안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 받으며 미유키는 주머니 속 공을 만지작거렸다. 경기가 늦게 끝나서, 길이 막혀서,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이토록 한심해보일 수가 없었다. 진작 이겼으면, 약속 장소를 경기장과 가까운 곳으로 부탁했다면, 애초에 나루미야네와의 경기가 아니었다면, 뒤늦은 가정으로 현실도피를 하는 사이 점원이 발을 멈췄다. 방 안은 조용했다. 안내를 해주었으니 돌아간 것은 아닐텐데,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미닫이를 열고 고개를 푹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미안, 사와무라!”

뭐라도 하나 날아올 것을 대비했으나 아무도 대꾸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미유키가 고개를 들자 현실감 없는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누가 수면가스라도 푼 것처럼 모두 땅이며 테이블에 널브러져있었던 것이다. 중앙에 앉아있어야 할 사와무라는 문 근처에서 술 잔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미유키와 눈이 마주치자 발간 얼굴로 귀엽게 웃으며 손을 뻗어왔다.

“와아- 미-유우ㄱ히 아임까아.”

발음이 늘어지는게 어지간히도 많이 마신 모양이다. 밑빠진 술독이라고 불리는 사와무라가 이렇게까지 취한 모습을 보이는 건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겨우 두 번째 보는 모습에 미유키는 말을 잃었다.

“사와무라” 미안, 이라는 말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사과를 해서 해결되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말을 안 할 수도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미유키가 입을 벌렸다. 그 순간 퍽, 하고 축축한 뭔가 오른쪽 볼에 닿았다. 사와무라가 지금 나한테 주먹질을 한건가? 하고 미유키가 잘못된 상황파악을 하는 사이, 둔한 움직임으로 사와무라가 손을 움직였다. 살짝 벌려진 입 속으로 축축하고 부드러운, 단 크림이 들어왔다.

“헤-이크 안머거슴다. 아안 조아하먼서 괘니 부타캐서”

느린 말투로 그렇게 말한 사와무라는 손에 묻은 크림을 핥아먹으며 나른하게 웃었다. 상황파악 못하고 고개를 드는 분신을 탓할 수 없을만큼 섹시했다. 미유키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아 스스로를 벌했다.

“사와무라,” “에이준” 미유키는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손을 뻗어오는 사와무라를 피하며 이름을 불렀다.

“미안.”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장황하게 변명할 생각도 들지 않아 미안하다고만 한 번 더 말했다.

“카즈야아” 하고 사와무라가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보이며 흔드는 모양이 뭔가 달라는 듯 했다. 미유키가 아차, 하고 다급하게 공은 건네자 사와무라는 고맙슴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미유키가 놀라 이마를 받치자 그대로 힘을 풀어 기댄 상태로 말을 이었다.

“봐씀다. 이겼잖슴까”

“응. 이기겠다고 했잖아.”

“그러죠. 사-나이 미유키이 카아즈야, 한닙으로 두말, 안하지요.”

하지만 미유키는 제일 중요한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 가슴이 콕콕 찔려 입을 다물고 괜히 바닥에 엎어진 쿠라모치를 노려봤다. 사와무라는 얼굴을 숙이고 있는게 불편한지 미유키의 손목을 잡아왔다.

“보싯쇼. 호-옴 런 쳤지요. 이겨-찌요. 케-이크 가치 머거찌요.”

고개를 번쩍 들어올린 사와무라가 씨익 하고 개구장이처럼 웃으며 자신의 손과 미유키의 손을, 정확히는 둘의 시계를 미유키의 눈 앞으로 내밀었다.

“트뼐 써-비씀다. 이겨쓰니까 시뿐 타임캣술 자똥했음다. 안느져써요.”

두 시계는 11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타임캡슐이 아니고 타임머신이겠지. 변하지 않는 녀석. 하고 마음 속에서 태클을 걸었다. 이렇게 다른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사랑스러운 연인의 귀여운 행동에 행복사 할 것 같았다.

“고마워.” 하고 말하니 어떻슴까, 라고 당장이라도 말할 듯 짓는 표정도 사랑스러웠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나를 만나러 와줘서, 나와 함께 해줘서, 고마워. 사와무라. 생일 축하해.”

진지한 미유키의 목소리에 부끄러워졌는지 새빨갛다 못해 까매진 얼굴로 사와무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유키”

진지한 목소리에 응, 하고 대답하자 사와무라는 침을 한 번 삼키더니 말을 꺼냈다.

“그래도 다음 해는 오프 받아오십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지만 제대로 요구하는 목소리에 미유키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사실 늦은 건 미유키가 아니라, 나지만ㅇ<-<

못치 생일에 에이준 축하글 쓰고 있어서 미안하다ㅠㅅㅠ)/ 쿠라모치도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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