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보쿠토 코타로, 3학년, 가을
보쿠토의 뜬금없었던 고백은 그 뒤로 흐지부지 사라졌다. 아카아시는 같은 성별의 선배에게 고백 받았던 사실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잊어버린 것도 같았다. 보쿠토는 종종 그 때 일을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라 주저했다.
보쿠토의 마음이 어지러운 것과 반대로 배구부는 순조롭게 봄고 1차 예선을 돌파했다. 승리에 간절하지 않은 선수들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레귤러 중 5명이 3학년으로 구성된 후쿠로다니는 절실함이 남달랐다. 전국에 출전했던 해보다 출전하지 못한 전적을 세는 것이 빠른 강호교라 해도 지름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목표가 전국제패라면 지름길은커녕 길을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를 걷는 일이었다.
한편으론 제아무리 부활동이 중요해도 학생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드레날린을 마구 생성하는 스포츠활동에 비해 교과수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식곤증과 사투하던 학생들에게 3학년 여학생이 2학년 남학생을 불러냈다는 대형 스캔들이 터졌다. 잠은 순식간에 달아났다. 그들의 관심은 여학생이 예쁘다는 말에 두 배로 뛰었고, 소문의 주인공인 남학생이 그들의 직속 후배라는 소리에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수업이 셋이나 남았다는 현실이 애통할 따름이었다.
쉬는 시간에 찾아가지 않은 게 어디인지. 보기 드문 반짝임으로 수업을 마무리 짓고 배구부원들이 달려 나왔다. 눈이 마주치자 다들 같은 생각으로 씨익 웃는다. 그 중 아무도 까맣게 타들어가는 보쿠토의 속을 몰랐다. 당사자인 보쿠토조차도 자신이 왜 그리 기분이 나쁜지 몰랐으니….
막상 부활동은 조용히 흘러갔다. 3학년들의 짓궂은 놀림에도 쉽게 입을 열지 않는 상대가 주인공인 덕분이었다. 개인적인 일입니다. 별 일 아니었습니다. 로 일관하며 연습 안하십니까? 라고 되물으면 장난칠 의지가 사라진다. 상대가 아카아시라는 것을 알고부터 진작 재미는 포기한 참이었다. 보쿠토가 매달리면 무거운 입이 조금은 열리련만, 오늘 보쿠토는 온종일 무기력할 모양이다.
많은 사람을 실망에 빠트린 아카아시는 전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태도로 연습을 마쳤다. 돌아갈 준비를 하지 않고 보쿠토와의 자율 연습을 대비하는 것까지 평범한 배구부의 일상이었다.
보쿠토는 컨디션이 나쁜 날도 자율 연습을 빼먹지 않는다. 오히려 더 혹독하게 몸을 혹사하는 날도 있었기에 주의가 필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타점은 점점 낮아지는데 잠깐 휴식을 취할 생각도 하지 않고 토스를 불러 아카아시는 손을 멈췄다.
“혹시 무릎이나 발목이 아프신가요?”
뛰는 데 전혀 집중을 하지 못하니 당연한 질문이다. 보쿠토는 괜히 신경써주는 척 하는 아카아시가 미웠다. 아카아시라면 자신의 답답한 속을 알고 있을 텐데 모른 체 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함께 있기 싫어 빨리 돌아갈 핑계를 찾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 전혀! 완전 튼튼해!”
일부러 쿵쿵 뛰며 말해보지만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조용히 공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아카아시를 붙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손이 땀으로 축축했다.
“괜찮으니까 올려줘. 집중이 안 돼서 그런 거니까.”
“…갑자기 집중이 될 리도 없지 않습니까. 괜히 무너진 폼으로 연습하시다가 버릇이라도 들면 곤란해요.”
“그래도. 오늘 부활동 중에도 제대로 못했고.”
“후, 그러면 내일 아침 연습 전에 일찍 오는 건 어떻습니까.”
다섯 시 반이면 될까요? 정확한 시간까지 잡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보쿠토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앉아서 쉬게 하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아카아시가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비명을 지른다. 시끄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소음은 보쿠토에게 아주 익숙해서 잠깐 졸 정도였다.
혼자서 넓은 체육관을 청소하는 건 역시 힘들었는지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깨웠을 때 바깥은 어두워져있었다. 평소에 돌아가는 것보단 이른 시간이었지만 왠지 시간 낭비를 한 기분이라 아까웠다.
돌아가는 길은 조용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화젯거리를 이어가는 보쿠토가 입을 다문 탓이었다. 말이 없다고 어색할 사이도 아닌데도 걷는 속도가 자꾸 빨라졌다. 한 골목만 더 걸어가면 헤어져야하는 갈림길이었다. 보쿠토는 익숙한 풍경에 발걸음을 조금씩 늦추다 발을 멈췄다. 공기는 쌀쌀하게 느껴지는 데도 손은 자꾸만 땀으로 젖었다.
옆에서 들리던 발걸음이 멎다 아카아시도 몇 걸음 옮기다 돌아본다. 얼굴에 무슨 일이냐고 쓰여 있었다. 보쿠토가 아무리 우물쭈물 거려도 재촉하진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침을 수십 번 삼켜대고서야 보쿠토는 용기를 냈다.
“오늘 불려갔었다며.”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가로등 불 아래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주홍 불빛 아래의 아카아시가 낯설었다.
“네? 아, 그거. 네. 그런 일이 있었죠.”
다른 사람들이 신나게 캐물을 때는 조용히 있더니 이제와 묻는 것이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낮고 부드럽다. 내가 고백했을 때는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부정했으면서, 투정부리고 싶은 마음을 밀어 넣었다.
뭐래?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헛기침을 해야 했다. 아카아시가 이번에도 별 일 아니라 말해주면 넘어갈 생각이었다. 고백을 받았는가 여부는 보쿠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거절을 했느냐가 중요했다. 대답이 돌아오기 까지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보쿠토는 초조해졌다.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모양이다. 고민해서 말할 것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다른 애들에게처럼 딱 잘라 선을 긋지 않는 것이 괜히 설레기도 했다.
“사귈 거야?”
“예? 아니요.”
결국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다행이 이번엔 대답이 빨랐다. 그럴 거면 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말하지 않고 머뭇거렸는지 알 수 없다. 일단 진짜지? 라고 되물어 확답을 들은 보쿠토가 싱글싱글 웃으며 한 걸음을 옮겼다. 뭐랬는데? 이번엔 정말 마음 편하게 물을 수 있었다. 아카아시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보쿠토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봄고 대표결정전 일정과…, 좋아하는 음식 같은 걸 물어보셨습니다.”
뭐어???? 비명이나 다름없는 괴성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라고 묻자 말씀드렸습니다만, 보쿠토씨 주위에 민폐입니다. 라는 냉정한 대답만 돌아온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안 사귄다며?!"
“예. 고백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려가서 대회 일정과 좋아하는 음식만 말해주고 왔다는 얘기다. 그게 무슨 의미겠는가. 대회 때 도시락을 주겠다는 의사표시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다.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른 척 하는 건지,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되묻는 표정은 순수한 의문밖에 없었다.
"안 사귄다며?!"
"제 말 안 듣고 계신 겁니까?"
반복되는 화제에 지쳤는지 한숨이 무겁다. 보쿠토는 사귀면 안 된다고 소리쳤다. 아카아시는 그 말끝마다 안 사귄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했다.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아카아시의 지친 목소리를 듣고 보쿠토는 그가 정말로 자신의 고백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했지만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걔랑 사귀면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달리기의 경품도 아니고 선착순을 주장할 상황이 아니다. 같은 성별인 보쿠토보다 예쁜 여학생이 더 좋을 것이다. 보쿠토도 그 정도 상식은 있었다.
“대회가 코앞인데, 여, 여자 친구가 생기면 연습도 빠지고 그럴 거잖아!”
핑계랍시고 나온 말은 그동안 보쿠토가 들어온 사례 중 하나였다. 배구부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제법 괜찮은 이유를 찾은 것 같다고 자화자찬했건만 아카아시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험악했다.
“제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계셨던 건가요.”
보쿠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실언이었다고 사과해야 했지만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아카아시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뭔가 말을 하려다 고개를 숙였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속에 담긴 말을 삼키지 말고 토해주기를 바랬으나, 원망이나 비난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둘 다 입을 닫았다.
어느 때보다 어색한 분위기로 갈림길을 만났다. 한 골목도 남아있지 않던 거리가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아카아시는 그 와중에도 예의를 차려 내일 뵙겠노라 인사했다. 후배가 보인 친절에 보쿠토도 겨우 내일 늦지 말라는 말을 건넸다. 이미 뒤돌아가던 아카아시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다시 돌아 인사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조금은 화가 풀린 얼굴이었다.
어색하게 헤어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알람을 조금 이르게 앞당겼다. 쓸데없는 이야기라도 보내볼까 한참을 고민하던 보쿠토는 그대로 휴대폰을 끌어안고 잠들었다. 여학생 앞에 서있는 아카아시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좋아합니다.’
목 안쪽 깊숙한 곳부터 간지러워지는 목소리에 보쿠토는 눈을 번쩍 떴다. 지각이었다.
*
분명히! 알람! 맞춰뒀는데!!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순식간에 기억이 날아갈 만큼 충격적이었다. 어제 그렇게 헤어지면서 일찍 오라고 말해놓고 자신이 늦어버리다니…. 안 그래도 잘못한 게 있는 보쿠토는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학교로 뛰어갔다.
약속했던 다섯 시 반에서 삼십분이나 늦은 여섯시를 넘겨서 교문을 통과했다. 체육관에 가까워질수록 잔소리가 두려워 발이 자꾸만 멈췄다. 대부분의 운동부는 아침 연습을 갖지만 이정도 이른 시간부터 시작하진 않는다. 덕분에 보쿠토는 체육관에 도착해서야 이상함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체육관은 불도 켜져 있지 않았고 문도 잠겨 있었다.
아카아시가 늦을 리가 없는데?? 기다리다가 돌아갔나?? 이게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해서 잠긴 문을 붙잡고 섰다. 양 손으로 문을 붙잡고 두드리면 아카아시가 또 늦으실 거냐며 딱딱한 목소리로 문을 열어줄 것만 같았다. 아카아시- 하고 몇 번을 불러도 문이 열릴 기색은 없었다. 대답은 등 뒤에서 돌아왔다.
“보쿠토씨? 일찍 오셨네요.”
얼마나 의외였는지 목소리가 가볍고 높았다. 늦었잖아! 하고 외치니 네? 하고 되물어 온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직 연습시간이 되려면 멀었는데요?”
“다섯 시 반에 나와서 일찍부터 어울려주기로 했잖아!"
시간을 확인하는 아카아시에게 보쿠토는 제시간에 온 것처럼 당당히 외쳤다. 지금 막 도착한 것이 분명한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언제 왔는지 모를 것이다. 아카아시는 무슨 이야기인지 따라가질 못해 자꾸만 되물었다.
“제가요?"
“그래!! 늦은 건 그렇다 쳐도 모른 척 하면 안 되지!"
네가 오늘 일찍 나오겠다고 해서 어제도 일찍 들어간 건데, 하고 툴툴 거리자 아카아시는 체육관 열쇠를 꺼내며 말했다.
"무슨 소리하시는 겁니까. 어제 컨디션 좋다고 평소보다 무리하고 돌아갔잖아요."
질린 목소리다. 그건 어제가 아니고, 라고 말하려던 보쿠토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어제도 봤던 날짜가 반짝였다. 늦었다는 것에 신경이 팔려 눈치 채지 못했다. 요즘 돌아가는 일이 드물었던 탓도 있었다.
"어?? 어어??? 꾸,꿈이었나?"
머리를 긁적이며 둘러대자 아카아시는 피식하고 웃었다. 얼마나 연습이 하고 싶었으면 그런 꿈을 꿨냐며 못 말리겠다고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보쿠토는 좋은 생각이 떠올라 싱글싱글 웃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언제 어디로 불려갔는지 몰랐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서 관심 없는 척 했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으니 오전 쉬는 시간 중에 불려서 점심시간에 만났을 거라 추측할 수 있었다. 감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보쿠토도 이리저리 고백 받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경험에서 나온 추리였다. 쉬는 시간은 고백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그런 결론을 내리자 보쿠토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했다. 쉬는 시간마다 아카아시를 찾아가거나 불러내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급하다고 문자 폭탄을 보내서 불러내고 배고프다고 칭얼거리거나, 심심하다고 재밌는 얘기라도 들려달라고 조르거나, 멀쩡히 있는 체육복이 없다며 빌려달라는 등의 쓸데없는 일로 아카아시의 정신을 빼놓았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쉬고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어도 보쿠토의 부름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아침에 혼자 기다렸던 게 어지간히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착각해주면 보쿠토는 감사할 따름이다.
쪽지를 받았다거나 누가 불렀다는 말을 듣는 일 없이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컨디션으로 정해진 부활동이 끝났다. 오늘따라 유달리 시달렸던 아카아시의 어깨에 여러 사람의 손이 스쳤다. 네가 고생이 많다는 의미였다.
이런 날이면 일찍 돌아가도 좋을 텐데…, 다른 이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보쿠토는 자율훈련도 할 거라고 우겼다. 아직 방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하더라도 시도도 못하고 실패한 고백을 포기할 리 없다. 적어도 대표결정전이 시작될 때까지는 계속 옆에 둬야겠다고 보쿠토는 생각했다. 영문도 모른 채 괴롭힘을 당하게 될 아카아시에게는 미안했지만 보쿠토는 절박했고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조금만 더, 를 연신 외치는 보쿠토 때문에 전 날보다 오래 붙잡혀 있어야 했던 아카아시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하며 걸어가는 모습이 위태롭게만 보였다. 내일도 많이 괴롭힐 건데, 어쩌지. 라는 태평한 생각을 하며 보쿠토는 말 수를 조금 줄였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릴 일 없고,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삭막한 도시의 가을 밤. 그래도 둘이 함께 걷는 길이라 운치 있게 느껴졌다.
그랬기에 보쿠토는 처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식할 수 없었다.
빠앙―하고 길게 울렸던 클랙슨 소리가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그보다 둔탁한 북소리는 천둥처럼 들렸다. 보쿠토의 옆, 아카아시가 없다.
치였던 것은 자신이었을 텐데….
이상한 생각이 들어 보쿠토는 허겁지겁 아카아시를 찾았다. 정면으로 치인 것이 아니라 옆면에 부딪혀 튕겨나간 모양새였다. 쓰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 아카아시. 벌벌 떨며 기는 것보다 못한 걸음으로 다가가 이름을 부르자 목만 조금 움직이는 반응이 돌아왔다.
“…다, 친 곳은……”
그 꼴을 하고 누굴 챙기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물음도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눈앞이 깜깜했다. 지금, 바로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시간을 돌려야만 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로 움직였던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 어제는 아무 일 없이 안전하게 돌아갔으니까, 이건 자신이 시간을 돌린 탓이었다. 괜히 이 시간까지 붙잡고 돌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다. 아카아시가 다쳐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빌고 빌어도 시간이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생긴 이유도 쓰는 방법도 몰랐던 힘은 그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게 만든 후 사라져 버렸다.
보통 교통사고와 비교하면 심각한 부상은 아니라고 했다. 제일 크게 다친 곳은 무릎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아카아시는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는 진단을 선고받았다. 보쿠토에게는 움직일 수만 있다는 말로 들렸다. 자라나는 청소년이니 타박상으로 인한 멍도 금방 사라질 거라며 웃음 짓던 의사는 초상집과 같은 병실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떠나갔다.
아카아시의 부모님은 조금이나마 안심한 눈치였다. 심각한 사람은 후쿠로다니 배구부원들이었고, 죽을 것 같은 사람은 보쿠토였다. 오히려 당사자인 아카아시가 시원스럽게 보였다. 그의 냉정함은 시합에서 특히 강점으로 작용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발휘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마음으로 생각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라고 아카아시는 말했다. 여러분이 걱정입니다. 하고 이어 말한다. 여기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체육관으로 돌아가 새로운 세터와 호흡을 맞추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느냐 말하자, 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냐 되물어온다. 고작 이런 일로 멈출 거냐고 자극하면서, 두고 나아가라 말한다.
보쿠토는 어떻게 이게 ‘고작’이라는 말로 넘어갈 수 있냐고 물었다. 또 멈춰 서지 못할 것은 무엇이냐고 소리치기 까지 했다. 생각하지 못했던 반응인지 아카아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카아시의 부상이 과도한 연습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차라리 그랬다면 무리한 것 눈치 채지 못해 미안하다 자책을 하더라도, 슬프고 안타깝더라도, 네가 원했던 승리를 안겨주겠다고 일어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보쿠토의 죄가 그럴 수 없게 했다. 그의 탓이다. 없었던 일인 양 두고 일어설 수 없었다.
학교가 파하면 병원으로 달려와 면회시간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날이 사흘, 연습하러 가라는 문전박대에 문 앞에 죽치고 서있었던 이틀, 그리고 간신히 정해진 연습시간만 참가하고 돌아오기 시작한 나흘째. 줄곧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풀이 죽어 조심스럽게 병실 안으로 들어서는 보쿠토를 아카아시는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괜찮냐는 의미 없는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아 보쿠토는 입을 다물고 인사했다. 머뭇거리다 보조의자에 조용히 앉자 아카아시가 먼저 말을 걸었다.
“사실, 전 이대로도 상관없었어요. 괜찮다고 말했던 거, 그냥 한 말이 아니고 진심이었습니다. 어차피 고등학교 때까지만 할 생각이었으니까요.”
“라고 말해도 귀에 안 들어오시겠죠. 그래도 일단 말해두고 싶었습니다. 선배들의 마지막 시합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건 아쉬웠지만 경험은 있으니까 위안 삼을 생각이었어요.”
의미심장한 말에 보쿠토는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 시합을 함께한 경험이라니….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상체를 기울여 탁자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쨍한 색깔의 형광펜 세 개. 본 적 있는 물건이다. 그거. 하고 보쿠토가 반응하자 아카아시는 역시 보쿠토씨가 쓰셨던 거군요. 하고 말했다. 입가에 맺힌 것은 선명한 씁쓸함이었다.
“덕분에 계획이 전부 엉망이 됐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잘못 들어선 길부터 다시 시작하려고요.”
말을 마치며 펜 하나를 부러뜨렸다. 3월의 아카아시도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 땐 울고 있었는데, 눈앞의 아카아시는 웃고 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 좋아요. 그래서….”
그래서 그랬어요. 영문 모를 사과와 고백을 하며 아카아시가 고개를 숙였다. 그 위로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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