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와에게 보내는 키워드 : 동그랗게 뜬 눈, 가랑비, 라벤더
+ 미사와의 문장은 "악의는 없었다.", "그냥 조금 신경에 거슬릴 뿐이다.", "걷고 또 걸었다." 입니다.
바깥은 조용했다. 아침부터 보슬보슬 내리던 가랑비가 눈으로 바뀐 덕분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도 눈도 아닌 진눈깨비가 되어 기분까지 우울하게 만들었다. 사실 미유키는 날씨에 기분이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다. 즉 그의 기분은 날씨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가라 앉아 있었다. 괜히 창밖을 한 번 보고 시간을 확인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스코어북에 집중하려 했지만, 한 번 흐트러진 집중은 쉽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게 다 그 바보 때문이라고 탓을 할 만큼 미유키는 뻔뻔하지 못했다. 스스로를 속이듯 변명을 한마디 하자면 악의는 없었다고 말할 것이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니 그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미유키는 지금 분명 심술을 부리고 있다.
*
시작은 분명 그가 했다.
한 학년 아래의 언제나 밝게 웃는 기운찬 투수, 사와무라 에이준. 그는 그때 어디에서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끄러움에 질식할 것 같은 붉은 얼굴로 '당신이 좋다.'고 고한 후배를 보며 미유키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같은 물건이 달린 징그러운 후배라고 해도 호의는 호의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혐오는커녕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이 그를 채웠다. 시끄럽고 부산스럽지만 그만큼 사람을 모으는 활기를 가진 소년. 특히 마운드에서 빛나는 투수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귀여운 여자아이들에게 고백 받았을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기묘한 우월감에 미유키는 제대로 사고할 수 없었다. 누구를 대상으로 한 마음인지는 몰랐다. 사와무라와 친하게 지내는 후배 혹은 자신의 동기가 될 수도 있었고, 사와무라가 열렬히 따르던, 미유키에겐 한 번도 넘어서지 못했고 넘어설 기회조차 없어진 선배를 향했을 수도 있다.
'당신의 귀여운 후배가 누구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 보라,'며 속으로 우쭐대던 미유키는 "미안함다."하고 뜬금없이 사과하는 사와무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 순간 그에게 남은 것은 사와무라를 향해서가 아닌 미유키 본인을 향한 경멸뿐이었다.
사와무라는 의기소침해진 표정으로 "그런 표정을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음다." 하고 말을 이었다. 미유키의 표정이 어지간히 굳어있었던 탓이다. 미유키가 뭐라 변명할 틈도 없이 사와무라는 고개를 다시 한 번 숙였다.
"뭐, 이 마음을 받아달라거나 사귀어 달라거나 그런 거 바란 건 아님다. 말은 험해도 그, 당신 얼굴만은 괜찮고 인기 많은거 아니까 그냥 그렇게 넘어가 주세요."
머리를 헝클이며 고개를 든 사와무라는 평소처럼 웃고 있었지만 입가가 떨리고 있었다. 말을 잃은 미유키를 대신해서 사와무라는 정리되지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 뭐냐,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바보니까, 어설프게 피하면 이상하게 생각할거 아님까. 그러니까 말해두는 검다. 가끔, 어, 아니 이제부터 종종, 선배 주변에 안 가거나 공 받아달라고 안 찾아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요."
그럼 시간 뺏어서 미안하게 됐음다. 하고 산뜻하게 말하는 것과 달리 시와무라의 큰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잠깐 머뭇거리는 모습이 미유키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사와무라는 이내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자리를 벗어났다.
"사와무라."
불러 세워도 할 말이 마땅치 않았던 미유키는 메아리가 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음 날을 걱정했다.
그 걱정이 우스워질 정도로 사와무라는 평소와 달라진 점이 없었다. 물론 한눈에 반해 그 순간 고백한 것이 아니라면 새삼 의식하는 게 사와무라에겐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미유키는 도대체 좋아한다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행동의 어디에 피하는 모습이 있느냐고 묻고 싶어지곤 했다.
미유키의 머릿속에서 사와무라답지 않았던 고백이 사와무라다운 행동으로 잊혀져갈 무렵이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조금 자라는가 싶었던 사와무라의 최고 구속이 오른 것을 확인한 날이기도 했다.
"나이스 볼-, 컨디션 좋아 보이네." 라는 미유키 입장에선 지극히 당연한 말을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딱-하는 소리에 정면을 보자 사와무라가 몸을 둥그렇게 말아 쪼그리고 있었다. 이마를 부여잡은 두 손과 땅바닥을 구르고 있는 공. 대번에 맞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깜짝 놀라 미유키가 일어서자 사와무라는 한 손을 뻗어 흔들며 괜찮다고 외쳤지만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가자 사와무라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주위를 살폈다. 불펜엔 단 둘 뿐. 도망갈 구석이라고는 없다는 것을 깨닫자 한숨과 함께 두 손안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괜찮냐?"
한 손을 어깨에 두고 다른 한 손으로 고개를 들게 하려 했지만 사와무라는 있는 힘을 다해서 저항했다. 후배의 갑작스런 이상행동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이름을 부른 순간, 정확히는 미유키의 입김이 사와무라의 목을 스치고 사와무라가 움찔한 것과 동시에 미유키는 아차, 하고 생각했다. 아마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을 피는 사와무라의 귀와 목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디에 공을 맞은 건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새빨갛게 익은 사와무라의 얼굴과 원망이 가득담긴 눈을 마주하며 미유키는 도대체 왜?? 라고 건네지 못할 의문을 품었다.
[나이스 볼], [컨디션 좋아 보이네.] 짧은 문장이었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건넸던 말이었다. 굳이 사와무라에 한해서가 아니라 그가 공을 받은 모든 투수들을 향해서 수 백, 수천 번도 했을 말. 공이 잘 들어오면, 마치 배를 눌려 사랑해를 말하는 곰, 아니 예시가 잘못된 것 같다고 미유키는 고개를 한 번 젓고 다시 생각했다. 미유키에게 나이스 볼이란 말은 레몬을 보면 침이 나오는 반사작용처럼 당연하게 배어있는 말이었다.
'칭찬을 받아서 좋은 건가? 근데 처음 하는 말도 아닌데. 그때마다 이러진 않았잖아?'
아파서인지 다른 이유때문인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노려보는 얼굴이 못생기고 귀여웠다.
"그래서 괜찮다고 했는데."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당신 때문이잖아. 라고 말하고 있어서 미유키는 미안, 하고 저도 모르게 사과를 했다.
"오늘은 그만하면 안 되겠음까? 내일부턴 괜찮을 테니까."
무슨 의지인지 결연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눌려 고개를 끄덕이자 사와무라는 벌떡 일어섰다. 아직 붉은 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얼굴이 조금 전 미유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을 다시 불러왔다.
'귀엽다고 생각하다니 미쳤나...' 멀리서 사고치고 쫓겨났냐고 비웃는 쿠라모치의 목소리가 미유키의 고막을 두드렸다. 사고 친 건 나일지도 모르겠다고 들리지 않을 대꾸를 하며 미유키는 한동안 불펜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당차게 말했던 것처럼 사와무라는 꽤 평범하게 행동했다. 바보라서 어설프게 피하면 들킬 테니까, 라고 했던 변명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제는 어느 정도 피하지 않을까 짐작했던 미유키의 시선을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연습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정해진 연습량이 끝나도 불펜을 떠나는 일 없이 더 던지겠다고 졸랐고, 저녁이면 공을 받아 달라 쫓아왔다. 평소와 다른 점은 거절당하면 순순히 물러난다는 점이었다.
'당신 정포수로서 실격 아님까? 곧 에이스님이 될 이 몸의 공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검까?' 라거나 '던지면 던질수록 진화하는 이 몸의 공! 지금 받지 않으면 여차할 때 놓칠지도 모른다구요?' 같은 허세가 듬뿍 담긴 말을 늘어놓는 것도 여전했다. 하지만 초조가 안도로 바뀌는 표정을 보고 있는 미유키는 이대로 계속 모른 척해도 되는지 불안해지곤 했다.
습관처럼 조르고, 불안에 떨다, 거절을 듣고서 웃음을 보이는 사와무라를 향해 미유키는 종종 '너 나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당황할까, 화낼까, 이번이야 말로 울어버릴까, 생각하다 사와무라가 '카-리-바- 공! 받아줘!!'하고 기숙사가 떠나가도록 외치며 멀어지는 뒷모습에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를 미유키는 아직 몰랐다.
그 이후로도 사와무라가 미유키를 피하는 모습은 아주 조금씩 미유키의 눈에 발견됐다. 식당에서 자리를 하나 건너뛰고 앉아 후루야가 그 사이에 오도록 한다든지, 교내에서 마주치면 멀리서 인사만 하고 바쁘게 사라진다든지, 불펜에서 대화가 줄었다든지 하는 아주 소소한 일들이었다. 원래 웃으며 대화하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이상할 거 없는 일들이라 미유키는 그냥 조금 신경에 거슬릴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사와무라가 이상하다고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미유키에게 스트레스가 되고 있었다고 깨달은 것은 우습게도 쿠라모치에게 지적받은 후였다. 사와무라와 미유키가 서먹해진 것을 유일하게 눈치 챈 쿠라모치가 '너 그 날 얼마나 혼냈기에 저러냐.'고 물어 왔을 때, 미유키는 말을 잃었다. 알아차려주었다고 한들 거기다가 대고 '사와무라가 내가 좋다고 했는데 이젠 피하네.'라고 말할 수 없었으니까. 미유키는 왠지 모르게 시원해진 속을 무시하며 '그 날? 무슨 소리야?'하고 시치미를 뗐다. 생긴 것과 다르게 속 깊은 쿠라모치는 한숨과 함께 '모르면 말고'라고 말했고, 알아서 문제인 미유키는 모른 척 웃어넘겼다.
*
"사귀자."
동그랗게 뜬 눈이 당황스러움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보며 미유키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른 채 입을 움직였다.
"너 말야, 티내지 않겠다더니 공 받으러오는 횟수는 점점 줄지, 말 걸면 깜짝 놀라지, 교내에서 부르면 멀어지고, 식당에서 만나면 다 먹지도 않았는데 일어나고. 이건 대놓고 뭔가 있어요~ 로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냐?"
"피하는 건 넌데 억울하게 다들 나보고 너한테 무슨 짓 했냐고 묻고 말이야."
"야구할 때 집중하면 말 안하려고 했는데, 너 요즘 불펜에서도 불편해하잖아. 안 그래?"
쪼잔 해 보인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한 번 터져 나온 불만은 터진 댐처럼 막힘없이 흘러나갔다. 그나마 이성을 잃은 게 아니라 소심해보일 법한 불만은 입에 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사와무라는 점점 티가 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지 그대로 듣고만 있었다. 불안하게 데구루루 구르며 주위를 살피는 눈동자나 할 말이 있는지 뻐끔거리는 입술에 시선을 뺏기는 사이 사와무라가 입을 열었다.
"죄송함다."
입이 댓 발은 튀어나온 상태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괴롭히려고 불러낸 게 아닌데, 미유키가 한숨을 내쉬자 사와무라는 살짝 떨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도..."
그게 방금 그거에 설명은 되지 않는다고 작은 목소리로 꿍얼거리는 사와무라의 목소리는 미유키에게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님다."
되묻는다고 해도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린 사와무라를 보며 미유키는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러면, 하고 더 묻지 않겠다는 의도로 말을 건네자 사와무라의 고개가 살짝 돌아왔다.
"아까 그 얘기 말인데, 너 그대로 숨기려고 하다가 컨디션 무너뜨릴 바에야 나한테 그 마음 넘기라는 말이야. 내가 받아 줄테니까."
나 포수고, 라는 쓸데없는 말을 한 마디 덧붙이며 미유키는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좋슴다! 하고 금방 밝게 대답할 줄 알았던 사와무라가 이상하게 조용해 침묵이 길어졌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민망해진 미유키가 '싫으면 말고.'라고 농담으로 얼버무리려 고개를 들자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있는 사와무라와 마주쳤다. 이렇게도 웃는구나, 하고 미유키가 묘한 감탄을 하는 사이 사와무라가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뭐?"
"뭐냐니, 당신이 말하지 않았음까. 사귀자구요."
마치 내일 훈련은 근육트레이닝에 집중하라는 말에 알겠다고 답하는 말투였다. 사와무라답지 않은 웃음에 가슴이 술렁였던 것이 착각이라고 말하듯 사와무라는 큰소리로 '잘부탁드립니다.'하고 인사했다. 박력 넘치는 목소리에 떠밀려 같이 고개를 숙이며 '나도'라고 대답하면서 미유키는 사귄다는 게 이런 건가? 이 녀석 전속 포수 해준다고 이해한건 아니겠지? 라는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 불안이 생겨났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음다! 안녕히 주무십쇼."
경쾌한 인사와 함께 또 다시 홀로 불펜에 남겨진 미유키는 불안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우리 사귀기로 한 거 맞지? 같이 돌아가도 되지 않아?'
사와무라가 떠난 자리에는 뒤늦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생각과 미유키의 긴 한숨만이 자리에 남아있었다.
*
연인으로써 사와무라는 최악이었다. 여자들은 이런 남자를 좋아할지도 모르겠지만, 미유키는 그런 것을 물어볼 만큼 친한 여자 친구도 없었다. 그러므로 불쌍한 제 연인을 위해 한 가지 수식어를 붙여주기로 했다. 사와무라는 미유키 카즈야에게 최악의 연인이다.
사와무라와 미유키가 사귀기로 한 그 다음 날부터 사와무라는 누가 봐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태도를 바꿨다. 괴롭힘을 당해 질색하며 피하던 사람에서 약점을 잡혀 그 폭로를 막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운동계 후배로. 미유키에게 '쟤한테 뭐 했냐'고 묻던 이들이 모두 '그만 좀 봐줘라'고 말을 바꾼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뒤편으로는 주장이자 주전 포수인 미유키에게 아부해서 에이스자리를 노린다는 소리가 돌고 있다고 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미유키는 말릴 수 없었다. 말릴 수 없었다기보다는 '이 정도쯤은 연인으로써 당연하지 않습니까?!'따위의 말과 반짝이는 눈빛 공격에 꼬리를 내렸다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 때 크리스를 쫓아다녔던 것처럼 밥을 챙기고, 훈련을 함께하며 필요한 것은 없는지 항상 쳐다보고 있었다. 보통 투수들을 신경 쓰기만 했던 미유키에 새로운 경험이긴 했다. 그래도 지나가는 말투로 한 번 먹어보고 싶다고 했던 편의점의 신제품을 사오는 것은 놀랍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으므로 그만둬줬으면 좋겠다고 미유키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무엇보다 미유키가 사와무라에게 말하지 못한 불만은 따로 있었다. 말끝마다 '연인이니까'를 붙이며 물량공세를 하는 주제에 정말 연인 같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점이었다. 누군가 기대했느냐고 묻는다면 미유키는 극구 부인할 것이다.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나서지 않는 이유는 '자신은 원하지 않으니까'였다.
그를 좋다고 말한 것은 사와무라다. 어째서 전처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지 않는 지, 더 이상 설레지 않는 건지, 차마 묻지 못했다. 성실한 후배의 가면을 무너뜨렸던 마법의 단어 '나이스 볼'은 연인에겐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모순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는지 모르는지 미유키는 사와무라가 자신에게 손을 대게하기 위해 날마다 고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른다.
*
하늘은 아침부터 흐렸다. 언제 빗방울이 떨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흐린 하늘을 보며 카타오카 감독은 오후 연습을 자율로 변경했다. 삼삼오오 모여 운동장이나 실내 연습장으로 움직이는 부원들을 보며 미유키는 저도 모르게 사와무라를 찾았다. 투수끼리 뭔가 하려고 했는지 카와카미와 후루야, 토죠와 함께 이야기하던 사와무라는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미유키와 눈이 맞자 환하게 웃었다. 그에게 다가오려고 하는 모습에 손을 절레절레 젓자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절로 나왔다. 미유키가 슬며시 웃는 모습에 다가오려다 후루야에게 목덜미를 붙잡혀서 왁왁 거리는 모습까지 보고 미유키는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라면 사와무라의 연습에 방해밖에 되지 않는다. 들어가서 빨래라도 돌리고 나오면 그사이에 미유키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연습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미유키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서 조금 상처받았다. 점점 사와무라에게 자신도 정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유키는 한 발 다가설 용기가 없어 뒤를 돌았다.
"어라...?"
"뭠까?"
섬유유연제를 넣으려다 절로 나온 감탄사에 반응하는 목소리가 있어 미유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굳이 뒤를 돌지 않아도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지만 가슴을 부여잡고 고개를 돌리자 같이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진 사와무라가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놀람까."
"소리도 없이 뒤에서 나타나니까 그렇지."
타박을 하며 텅 비어있는 곽으로 사와무라의 머리를 툭 치니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간이 작은 남자군요, 미유키선배는."
"누구 때문이냐."
툭 튀어나온 입을 붙잡고 양쪽으로 흔들어주자 사와무라는 으흐으!!으흐즈으으!라는 말이 되지 않은 소리를 내질렀다. 손에서 힘을 살짝 풀자마자 반대쪽 벽까지 도망쳐간 사와무라는 두 손으로 입을 방어하고 '너무하는 거 아님까??' 하고 외쳤다.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반복되던 말을 따라한 순간 사와무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미유키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와무라 스스로 꺼낸 말이다. 지금도 미유키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만큼 큰소리로 외친 주제에 도대체 왜 당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 말야,"
"그! 그건 그렇고!! 방금 뭐였음까?"
참다못해 질문을 던지려는 미유키를 가로막는 큰 목소리로 사와무라가 외쳤다. '필사적'이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 만큼 떨리는 목소리에 이번에도 내가 져준다, 라는 마음으로 미유키가 화제변경에 넘어가주었다.
"아, 섬유유연제가 떨어져서."
방금 사와무라의 머리 위에 올라갔었던 곽을 거꾸로 뒤집어 흔들었다. 소리도 없이 가루 몇 알이 떨어져 내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곽이 움직이는 대로 고개를 흔들흔들 움직이던 사와무라가 'X리 라, 라벤-더향...'하고 상표를 읽었다.
"미유키 선배의 향기는 거기서 나왔던 거군요."
'새로운 사실을 배웠군!'같은 말투였다. 그 속에 담긴 단어 하나에 미유키는 움찔했다. 냄새도 아니고 향기라니. 함께 그라운드를 뒹굴며 땀 냄새를 풍기는 사이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사와무라가 미유키에게서 맡은 냄새에 라벤더의 ㄹ자라도 남아 있었을지 미유키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디 코에 문제라도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을 하려고 해봐도 묘하게 붕 떠서 두근거리는 가슴은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제가 사올까요?"
"지금?"
"그럼 지금이지 언제겠음까. 지금 필요한 거 아님니까?"
"필요하긴 한데."
아무거나 써도 상관없고. 라는 뒷말은 입안에서 맴돌 뿐 나가지 않았다. 미유키가 특별히 이 향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 없이 구입해서 큰 의미 없이 사용하다 마침 다 떨어졌을 뿐이었다. 꼭 지금, 다른 사람들은 연습 중인 이 시간에 사오라고 시킬 이유는 없었다.
‘너에게 소중한 야구를 하는 시간이잖아?’
사와무라를 생각해주는 말이 혀끝에 맴돌았지만 나오는 일은 없었다.
“맡겨만 주십쇼!"
기운찬 목소리에 미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에 비해 유난히도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눈을 이길 수 없다고 변명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사와무라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달려서 다녀온다고 했으니 금방 오겠지.’
처음 섣부르게 단정 지은 자신을 원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편의점에 다녀올 시간,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는 마트를 다녀올 시간이 지나자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모른 척한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제 와서...'라는 생각이 들어 좀처럼 일어날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이지도 스코어북에 집중하지도 못한 시간이 흐르고 바깥이 조용해졌다.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바깥, 아마 그라운드 쪽에서 크게 외쳤을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눈이다-!!!‘
미유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눈이라면 맞고 돌아올 수도 있다. 비 때문에 어딘가로 피했던 거라면 곧 돌아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조금만, 앞으로 10분만 더 기다리자. 10분만 더, 5분만, 입구에서 마주치면 민망하니까 10분 더. 제 속을 까맣게 태우는 미련한 자존심 싸움 끝에 미유키는 우산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
사와무라는 어딘지 모를 곳, 처음 보는 가게의 처마 밑에서 진눈깨비를 피하고 있었다. 본래 성격대로라면 이정도 비나 눈 정도야! 라고 기합으로 무시했겠지만 괜히 혼날 일을 하나 더 늘릴 상황이 아니었다.
‘로드워크 대신 달려서 금방 다녀오겠음다!‘ 하고 자신 있게 말하며 출발했지만 사실 사와무라에게 달릴 의욕은 없었다. 장소가 그라운드였다면 눈감고도 얼마든지, 아니 그러면 혼날 테니 고개를 숙이고 얼마든지 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차와 부딪칠지도 모르는 길에서 괜히 위험을 무릅쓰고 달리고 싶지 않았다. 넘어지기라도 해서 다치면 괜히 부탁했다고 미유키가 자책할지도 모르니까.
‘자책...하려나? 아니, 일단 화부터 내겠지.’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항상 긍정적으로 앞을 향해 전진하는 게 사와무라의 유일한 장점이었는데, 잘해보려고 할수록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처음 보는 장소에서 이렇게 날씨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그 최종판이라는 느낌이었다. 어디서 길을 잘못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주변의 풍경을 즐길 여유도 없이 그냥 땅만 바라보며 그냥 걷고 또 걸었으니까. 사와무라의 머릿속에는 길을 잃기 전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라는 후회만이 가득했다.
사와무라는 미유키가 좋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자신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할 정도로 당연한 일처럼 눈으로 좇고 있었다. 가을대회 후반부에 다들 알고 있었던 미유키의 부상을 혼자만 몰랐던 것이 마음을 자각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미유키에 대한 모든 것이 알고 싶었다. 누구도 모르는 미유키를 알고 싶었고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토록 강한 충동에 사와무라는 정말 많이 고민했다. 아카기 중학교의 친구들과 같은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했던 때보다 더 많이 생각했다. 꽤 오랜 시간 고심한 끝에 나온 결론은 사와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백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결코 가볍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미유키가 아닌 다른 남자가 사와무라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했을 때 어떤 기분일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그 나름대로 조사하고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미유키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모두 받아들일 각오를 했다. 물론 마음을 전하는 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각오는 했다고 하더라도 미유키가 자신을 혐오스럽게 쳐다봐도 괜찮다는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미유키의 반응은 사와무라가 생각했던 수많은 상상 중에 제일 양호한 편이었다. 그렇게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본 적 없었지만, 사와무라가 역겨워서는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마음을 한 번 토해내고 나니 괜찮아졌다, 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미유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어주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분 좋은 미트의 소리와 청량한 목소리와 마스크 뒤로 보이는 얼굴이 1년 전과 오버랩 되는 순간, 사와무라는 깨달았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사와무라가 미유키를 알게 된 이후로 그를 좋아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깨끗하게 차였다고 알고 있어도 좋아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몸집을 불리며 불쑥불쑥 튀어나오려고 해서 곤혹스러웠다. 쿠라모치에게 주의를 듣고, 코미나토의 걱정을 사고, 둔하기 그지없는 후루야가 무슨 일 있냐고 묻는 수준까지 간 어느 날,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불러냈다.
잔뜩 긴장한 사와무라에게 던져진 말은 딱 세글자. 꿈에서도 상상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기뻐해야하는데도 '눈치를 살핀다.'는 행동을 하는 미유키가 낯설어 당황하고 말았다. 미유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기뻐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뭐야 그게, 장난하는 거야? 라고 화내고 싶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귀어주겠다는 태도라니, 어디의 높은 사람이냐고 묻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이 무시를 당한 기분이었다. 사와무라가 아닌 투수에게, 미유키가 아닌 포수로써 하는 말이지 않는가. 야구를 빼면 미유키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사와무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분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나는 그걸 숨기려 매일 죽어가는 느낌이라고 울부짖고 싶었다.
그 순간 모르는 척 해. 하고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미유키의 말에 가벼운 마음인 것처럼 동의하고 그의 연인이라는 자리를 차지해버리라고 목소리가 이어서 소곤거렸다. '미유키의 연인'이라는 말은 너무나 달콤했다. 그래서 그 말대로 모르는 척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도장을 찍 듯 사귀자고 말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속은 문드러졌어도 얼굴은 이미 웃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반하게 만들어주면 되지 않겠냐고 근거 없는 자만으로 가득한 생각을 했다.
그건 아주 멍청한 생각이었다.
친한 여자애들의 조언을 얻어 항상 챙겨주고, 지나가며 말한 물건을 사오기도 해봤다. 무엇보다 내가 당신의 연인이라 세뇌하듯 말해봤지만, 역효과였던 모양이었다. 늘 무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미유키는 이제는 아주 질렸다는 표정으로 사와무라를 향해 반문했다. 미유키의 입에서 '사랑스러운 연인'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터져버릴 뻔 했지만 그 표정을 보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만두는 게 어떠냐는 말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아 억지로 말을 돌리고 심부름을 하러 나왔는데, 이렇게 됐으니 정말 끝이라고 해도 사와무라는 할 말이 없었다. 무거운 사와무라의 마음과 반대로 하얀 입김이 하늘 높이 퍼졌다.
*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편의점을 지나 마트에서도 보이지 않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미유키는 엇갈려서 돌아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마트를 지나 주위를 배회한 이유는 혹시 길을 잃어버렸을까봐 찾다가 왔다는 변명을 하려는 꿍꿍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보다, 바보다 불러대긴 했지만 정말로 길을 잃고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미유키는 한숨을 내쉬는 대신 큰 소리로 사와무라를 불렀다.
"어이-, 거기 바보녀석!"
조용하던 골목에 어이-, 어이-, 하고 메아리가 치고 난 후 사와무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유키가 와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꼼짝없이 눈이 그치기를 기다렸던 사와무라는 동그란 눈을 크게 깜박이며 미유키를 올려다봤다.
"미유키선배? 왜 여기에..."
어떻게 찾았냐고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미유키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보다 이 추운 곳에 계속 있었을 사와무라의 몸이 더 걱정이기 때문이었다.
"왜긴 왜야. 어떤 바보 녀석이 비가 오는데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사와무라의 바로 앞까지 걸어간 미유키는 마주보고 쪼그려 앉았다. 코끝이 새빨개서 귀여웠지만 그럴 때는 아니었다. 무릎을 감싸고 있던 왼 손을 쓸어보자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미유키는 얼어있는 손이 아프지 않게 살살 주무르며 미안, 하고 사과했다. 사와무라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쿨쩍, 하고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울고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와무라였다. 큰 눈이 붉게 부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사와무라가 우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미유키와의 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깜짝 놀라 손을 뻗자 사와무라는 잡히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
"알았음다. 그동안, ...감사했음다."
"뭐어???"
조금 신경질적인 정도로 반문이 나가버린 것은 어쩔수 없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조금도 감을 잡지 못한 탓이었다. 사와무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더 이상 못 해먹겠다는 말 아님까."
"무슨 헛소리 하는 거야, 너. 너야말로 가벼운 마음으로 좋아한다거나 말해놓고 이제 와서 내 탓으로 돌리고 빠져나가는 거냐."
"하아?"
이번엔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말을 알 수가 없어 눈물이 멎었다. 순간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지만, 그가 한 말에 열이 받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누구 맘대로 가볍다느니 말하는 거냐, 미유키 카즈야!!"
사와무라는 체중을 싣고 덤벼드는 기세로 미유키의 멱살을 붙잡았다. 갑작스런 돌진에 뒤로 넘어지는가 싶었지만 미유키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대로 흙탕물에 주저앉아버렸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는 한편 과연 세이도의 주전포수라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아한다는 사람의 멱살을 이렇게 가볍게 잡는 점을 보고 말하는 거다. 바보무라."
평소의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돌아간 미유키를 보며 사와무라는 손에 힘을 풀었다. 이게 당신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스킨십이 아니냐고 는 대놓고 말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버린 사와무라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미유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사와무라, 하고 이름을 불렀다.
"너 말로는 연인이니, 사랑스럽니 어쩌니 하는 주제에 전혀 나한테 닿으려고 하지 않았잖아. 내가 먼저 다가가면 놀라서 흠칫거리기나 하고. 내 입장에서 보면 연인이 아니고 직속부하가 생긴 느낌이라고."
"그치만, 당신, 나랑 사귀어준다고 말했잖아."
"뭐?"
"나랑 사귀자는 게 아니고, 투수인 내가 컨디션이 나빠지니까, 어쩔 수, 없이, 사귀는, 휴,흉내 내주는, 거잖아. 그런데, 만지기라도하면, 당신이, 싫어하는, 짓, 하면, 경멸, 받으면, 나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사와무라는 말을 이어갔다. 괜히 눈물을 보여서 미유키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결심은 이미 아까 전에 깨졌다. 말이 끊어지더라도 그동안 했던 생각들을 전부 말하려고 했다. 무서웠다고, 당신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고, 싫어하지 말아달라고.
사와무라의 말은 미유키에게 안겨지며 끊겼다. 무릎이 젖어 들어가도 아랑곳 하지 않고 사와무라를 품에 안은 미유키는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말하며 등을 다독였다.
"내가 말이야, 어떤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드물어서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를 싫어하는 건 아냐. 애당초 투수라서 사귀어준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하지 않냐? 우리학교 투수들, 지금 1군에만 4명이라는 건 알고 있는 거 맞지?? 아무리 포수가 안방마님이라고 불리고 내가 천재 포수라고 해도 4명이랑 동시에 사귀는 건 무리라고."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가슴에 안겨 자기보다는 약간 느린, 그래도 분명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그동안 한 번이라도 이렇게 안겼으면 알 수 있었을까 고민 해봐도 이미 지난 일이었다. 미유키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하하, 하고 작게 웃음까지 나왔다.
"그럼 아까 사과는 왜 했음까?"
"그야 비 오는데 심부름 보냈으니까."
손은 이렇게 꽁꽁 얼었지. 필요하지도 않은 것 때문에, 라고 말하던 미유키는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와무라가 고개를 꺾어 미유키를 올려다봤다.
"필요하지도 않다니 무슨 말임까!"
"그야, 섬유유연제 같은 거 아무거나 쓰면 되니까. 하핫."
넉살좋게 웃어넘기려 했지만 사와무라는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거, 거짓말은 됐음다! 항상 그 향기였단 말임다."
"그거! 말하고 싶었는데 향기는 아니지, 향기는! 땀 냄새 안 나면 다행인 운동을 하고 있거든? 너 솔직히 라벤더 향기 맡아본 적 없지?"
"무! 무무무무슨 소릴! 라..라벨라 향이라면 제가 항상 애용하는 거스로!"
"네네, 그거 틀렸으니까."
물건 사러가서 이름도 모르고 가는 거냐고 한숨을 내쉬자 사와무라는 굉장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이 이젠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귀여워서 미유키는 웃어버렸다. 비웃는다고 생각했는지 왁왁 거리는 사와무라를 네네, 하고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일으켜 세웠다.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눈물자국과 얼어 있는 코와 땀에 짓눌린 머리 등 웃긴 몰골이 되어 있었다. 머리를 살짝 정리해주고 가자, 고 손을 내밀자 잠시 머뭇거리다 마주 잡아오는 손이 따듯해져 있어 기분이 좋았다.
어느새 눈도 그치고 구름 사이로 빛이 살짝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미유키에게 사와무라가 말을 걸었다.
"미유키 선배. 아까 그, 저기, 저저저, 그러니까 저를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했잖슴까?"
"그런데?"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는 불안에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새빨개진 사와무라가 미유키의 반대방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을 이었다.
"야, 야구에 비교하면 어떤 느낌임까?"
"야구에?"
"네."
자신이 말해놓고도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기분에 금방이라도 취소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참는 사이 미유키가 입을 열었다.
"그러네. 음, 지금은, 플라이로 뜬 공을 쫓고 쫓아서 제대로 미트에 받아낸 기분."
그거, 최고잖아. 하고 입이 벙긋거리는 사와무라를 향해 하핫, 하고 웃어 보인 미유키는 너는? 하고 되물었다.
"그거야 언제나 최고인 포수에게 스트라이크 던져 넣은 기분임다!"
-
왜 이렇게 길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겨우 썼다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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