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유키 카즈야가 뛰쳐나가다시피 구장을 빠져나갔다. 팬들에게 상냥하다 널리 알려져 있는 그가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이 쌩하니 지나치는 광경은 오랜 팬들조차 처음보는 것이었다. 주변의 소음은 그대로인데 남겨진 공간만이 싸늘했다.
“방금, 미유키 카즈야 맞...죠?”
한 팬의 누굴 향한 건지 모를 질문에 함께 버림받은 처지가 된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점 상황에서 13회 연장까지 갔지만 결국 본인, 미유키의 2점짜리 홈런으로 승리한 경기였다. 기분이 나빴을 리도 없었고, 이전에 처참하게 패한 후에도 웃으며 응원와줘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던 사람이었다. 적막을 깨트리고 새파랗게 질렸더라, 하고 누군가 말을 꺼냈다.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면서 마치 자신을 세뇌라도 할 것처럼 얼굴이 새파랗더라 하고 한 번 더 반복해서 말했다. 그 뒤를 이어 맞다, 얼굴이 창백하더라, 수심이 가득했다, 등의 누굴 위한 건지 모를 변명들이 이어졌다. 뭔가 아주 중대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지도 모르지, 하고 겨우 납득갈만한 상황을 만들어낸 팬들은 크게 다치지 않으셨다면 좋겠네요. 하고 마음을 모아 기도를 하며 헤어졌다.
팀의 간판인 미남 포수가 애인 생일 축하에 늦어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별로 기대 안함다. 이기고나 오십쇼!’
‘무슨 소리야. 이기는 건 당연한 거고, 이번엔 꼭 같이 축하할 거야. 케익 먹지 말고 기다려.’
‘단 거 못 먹는 사람이 웬 욕심임까. ...뭐, 일단은 기다리겠지만, 빨리 오겠다고 지고 오면 안됨다. 지면 문 안 열어줄거야. 알겠슴까?’
‘하핫, 여기 ㄴ, 우리 집이거든.’
내가 일부러 질 사람으로 보이냐, 그렇게 신뢰도가 없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꾹 눌러 참았던 아침의 대화가 자꾸만 미유키의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그간 저지른 일들이 있으니 신뢰도가 바닥인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올해야 말로 하고 벼르고 벼렸었는데... 또 한 번 시계를 확인하자 미유키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사와무라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미유키는 올해 연봉 협상 당시 연봉 오르고 내리는 건 상관없으니 5월 15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프를 달라는 요청을 했었다. 웬 떡이냐, 라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관계자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당당히 애인 생일이라고 밝히자, 물어본 주제에 관심없다는 얼굴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들키지나 말라는 잔소리와 함께 계약서에 당당히 ‘5월 15일은 경기에 나가지 않는다.’ 라는 항목을 추가할 수 있었다.
세상 만사 기대대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5월 15일. 미유키의 팀은 과거 이나시로의 황금 배터리였던 하라다와 나루미야가 소속된 팀과 경기를 하게 되었다. 미유키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아. 그렇구나.’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들이 프로가 된 지도 이젠 한 손이 넘어간다. 나루미야나 하라다와도 수 십이 넘는 경기를 치렀고 이길 때도 있었고, 질 때도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경기였다. 미유키 카즈야에게만.
사람들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미유키는 그 두 사람이 올해 처음으로, 다시 한 번 같은 팀이 되었다는 사실을 놓쳤던 것이다. 심지어 지금 미유키의 팀에는 후루야가 있었다. 6, 7년 전 뜨거웠던 여름의 경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며 당연히 미유키와 후루야가 선발로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가득했다. 프로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nn년 여름의 완벽 재현 같은 기사를 발견했을 때도 미유키는 그냥 웃고 넘어갔다. 당연했다. 이나시로는 나루미야가 확고한 에이스의 자리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세이도는 후루야만의 팀이 아니었다. 그의 고교시절 이나시로와의 마지막 시합에서 에이스 넘버는 후루야가 달고 있었지만, 그 전 시합의 에이스는 사와무라였다. 둘은 그의 졸업 후에도 끝까지 에이스 넘버를 두고 싸웠으며 서로를 성장시켰다. 또 그 둘이 무턱대고 돌진할 수 있었던 것은 카와카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의 세이도를 완벽 재현하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다. 뭐, 나루미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잠깐 웃고 넘어갈 사건이라고 미유키는 생각했다.
어라, 위험할지도? 라는 경각심을 미유키에게 심어준 사람은 어찌보면 관계자 중 하나인 사와무라였다.
‘이거 진짬까? 우와, 하얀 머리랑 사토루녀석이랑 붙는검까?’
미유키가 한 번 보고 던져둔 신문을 주워온 사와무라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당연히 미유키 카즈야가 선발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로 이겨야함다! 하고 소리쳤다. 오프를 받았다는 말을 안했으니 사와무라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미유키는 기대에 가득찬 사와무라에게 그 날 자신은 쉴 것이라 차마 말하지 못했다.
사와무라의 반짝이는 얼굴이 미유키의 심장을 괴롭히고, 그의 눈치를 살피는 관계자의 비굴한 웃음이 비위를 건드리는 나날이 며칠간 이어졌다. 미유키가 사와무라에게 어떻게 사실을 밝힐까 고민하는 사이 15일 선발 멤버가 먼저 발표됐다. 당연히 미유키 카즈야의 이름은 빠져있었다. 제일 먼저 소식을 접한 후루야가 종이 한 장을 들고와서 불만을 표했다. 몇 년이 지나도 발전이 없는 의사표현이었다.
‘이거...’하고 말을 줄이는 후루야에게 미유키는 ‘미안, 그 날 사와무라 생일이잖냐. 좀 봐주라.’ 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사와무라와 미유키의 관계는 전 세이도 야구부원들에게는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다. 둘의 사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을 후루야였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납득해 준 모양이었다. 사와무라와 비슷한 야구바보인 후루야가 쉽게 넘어가서 였을까, 미유키는 사와무라도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기뻐할 지도 모르겠다고 조금 기대도 했다. 돌아가자 멱살을 잡히며 순식간에 사라진 희망이었다.
‘어디 다쳤음까?’
멱살을 쥐고 할 말은 아니겠지만,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전신을 빠르게 훑으며 물었다. 미유키는 사와무라가 어떤 순서를 거쳐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아 가볍게 웃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걱정했냐고 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소라면 얼굴이 벌게져서 아니라고 고래고래 소리쳤을 텐데, 사와무라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멀쩡한데 갑자기 왜 선발에서 빠진 검까! 뭔가의 음모임까?? 밉보였음까? 선배랑 또 싸웠음까? 사토루가 선발이던데 당신이 맘에 안든다고 땡깡을 부린 것도 아닐테고 대체 왜 빠진 거야!?’
참고로 밉보인 일도, 선배와 싸운 일도, 선발 투수가 미유키가 마음에 안든다고 불평해 경기에 나가지 못했던 적도 진짜로 있었다.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심호흡을 유도하며 전부 아니라고 말했다.
‘그 날 원래 쉬기로 했었어.’
히-히-후- 하고 용도가 틀린 호흡을 하던 사와무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미유키를 올려다 봤다. 원래라니 원래가 내가 아는 원래인가 다른 특별한 뜻이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이 말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미유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니 생일이잖아.’
동그랗던 눈이 더 커지더니 멱살을 붙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눈동자가 빛을 잃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그게. 나직이 흘러나온 낯선 목소리에 미유키는 당황했다.
‘우리 사귄 뒤로 한 번도 제대로 축하해준 적 없었잖아. 그래도 나 니 애인인데, 같이 살고 있는데. 회식때문에 강제로 붙들리고, 입원하고, 한 번은 아예 까먹었고, 원정 경기가고...’
미유키는 지난 사와무라의 생일들을 떠올렸다. 결국 작년 생일 파티는 미유키가 모르는 대학 동기들과 함께 했다. ‘선배님들이 바쁘시다니 불초 사와무라 에이준, 어찌 생떼를 쓰겠음까! 따로 찾아주시기로 했음다! 그러니까 미유키는 집에서 제일 먼저 축하해주십쇼.’하고 웃는 사와무라의 말을 그대로 믿을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쿠라모치로부터 료상이 나중에 두고보자더라, 라는 전언을 받았다. 이번에도 미유키가 바빠서 참석을 못할 것 같은데, 세이도OB가 전부 모이면 신경쓸테니 자신이 따로 찾아뵙겠다고 부탁했다는 얘기였다. 자기 자신과 야구만 아는 부부젤라같던 녀석의 변화가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를 생각해주는 마음씀씀이가 고맙지 않을리 없었다. 사랑받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자신은 제대로 돌려주고 있는가, 하는 자문을 한다면 아니다, 라는 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 생일인지.’
확실히. 서운해야 할 사람은 사와무라지 미유키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사와무라가 먼저 말해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사와무라가 알았다면 어이없을 생각을 하며 미유키는 조용히 사와무라의 말을 기다렸다.
‘카즈야. 생일 선물 주십쇼.’
눈가가 살짝 빨개진 사와무라가 고개를 들며 미유키를 불렀다. 부끄럽다고 둘만 있어도 자주 부르지도 않는 이름이었다. 뭔들 못들어주랴,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준다고 했음다? 하고 재확인한 사와무라는 예쁘게 웃었다.
‘홈런볼이 갖고 싶슴다. 하얀 머리가 던진 걸로.’
줄게. 너에게 승리도 함께 모두 안겨줄게.
지금 생각하면 닭살돋는 말이었다. 분위기를 탄 감이 강했지만 진심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겼고 나루미야에게서 홈런도 뽑아냈다. 억지를 부려 연장전까지 버티고 버텼으니 힘이 풀린 탓도 있겠지만, 홈런에 연연하다 일단 경기를 끝내고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휘두른 타이밍에 홈런이라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13회 말이었고, 공이 전광판을 맞춘 순간 경기는 끝이 났다. 경기장 관계자에게 공 좀 찾아달라 부탁을 해서 공을 받고 허겁지겁 제대로 씻지도 않고 차에 올랐다. 팬들에게 잘해주라던 구단의 권유 같은 명령도 잊은 채였다.
늦은 밤이었지만 금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차안에서 시계만 쳐다봤다. 견인해가도 큰소리 치지 못할만큼 처참한 모양새로 주차를 하고 가게 문을 연 시간은 딱 12시 정각을 넘긴 때였다.
사와무라의 생일이 끝났다. 점원에게 사와무라의 이름을 말해 안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 받으며 미유키는 주머니 속 공을 만지작거렸다. 경기가 늦게 끝나서, 길이 막혀서,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이토록 한심해보일 수가 없었다. 진작 이겼으면, 약속 장소를 경기장과 가까운 곳으로 부탁했다면, 애초에 나루미야네와의 경기가 아니었다면, 뒤늦은 가정으로 현실도피를 하는 사이 점원이 발을 멈췄다. 방 안은 조용했다. 안내를 해주었으니 돌아간 것은 아닐텐데,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미닫이를 열고 고개를 푹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미안, 사와무라!”
뭐라도 하나 날아올 것을 대비했으나 아무도 대꾸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미유키가 고개를 들자 현실감 없는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누가 수면가스라도 푼 것처럼 모두 땅이며 테이블에 널브러져있었던 것이다. 중앙에 앉아있어야 할 사와무라는 문 근처에서 술 잔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미유키와 눈이 마주치자 발간 얼굴로 귀엽게 웃으며 손을 뻗어왔다.
“와아- 미-유우ㄱ히 아임까아.”
발음이 늘어지는게 어지간히도 많이 마신 모양이다. 밑빠진 술독이라고 불리는 사와무라가 이렇게까지 취한 모습을 보이는 건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겨우 두 번째 보는 모습에 미유키는 말을 잃었다.
“사와무라” 미안, 이라는 말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사과를 해서 해결되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말을 안 할 수도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미유키가 입을 벌렸다. 그 순간 퍽, 하고 축축한 뭔가 오른쪽 볼에 닿았다. 사와무라가 지금 나한테 주먹질을 한건가? 하고 미유키가 잘못된 상황파악을 하는 사이, 둔한 움직임으로 사와무라가 손을 움직였다. 살짝 벌려진 입 속으로 축축하고 부드러운, 단 크림이 들어왔다.
“헤-이크 안머거슴다. 아안 조아하먼서 괘니 부타캐서”
느린 말투로 그렇게 말한 사와무라는 손에 묻은 크림을 핥아먹으며 나른하게 웃었다. 상황파악 못하고 고개를 드는 분신을 탓할 수 없을만큼 섹시했다. 미유키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아 스스로를 벌했다.
“사와무라,” “에이준” 미유키는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손을 뻗어오는 사와무라를 피하며 이름을 불렀다.
“미안.”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장황하게 변명할 생각도 들지 않아 미안하다고만 한 번 더 말했다.
“카즈야아” 하고 사와무라가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보이며 흔드는 모양이 뭔가 달라는 듯 했다. 미유키가 아차, 하고 다급하게 공은 건네자 사와무라는 고맙슴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미유키가 놀라 이마를 받치자 그대로 힘을 풀어 기댄 상태로 말을 이었다.
“봐씀다. 이겼잖슴까”
“응. 이기겠다고 했잖아.”
“그러죠. 사-나이 미유키이 카아즈야, 한닙으로 두말, 안하지요.”
하지만 미유키는 제일 중요한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 가슴이 콕콕 찔려 입을 다물고 괜히 바닥에 엎어진 쿠라모치를 노려봤다. 사와무라는 얼굴을 숙이고 있는게 불편한지 미유키의 손목을 잡아왔다.
“보싯쇼. 호-옴 런 쳤지요. 이겨-찌요. 케-이크 가치 머거찌요.”
고개를 번쩍 들어올린 사와무라가 씨익 하고 개구장이처럼 웃으며 자신의 손과 미유키의 손을, 정확히는 둘의 시계를 미유키의 눈 앞으로 내밀었다.
“트뼐 써-비씀다. 이겨쓰니까 시뿐 타임캣술 자똥했음다. 안느져써요.”
두 시계는 11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타임캡슐이 아니고 타임머신이겠지. 변하지 않는 녀석. 하고 마음 속에서 태클을 걸었다. 이렇게 다른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사랑스러운 연인의 귀여운 행동에 행복사 할 것 같았다.
“고마워.” 하고 말하니 어떻슴까, 라고 당장이라도 말할 듯 짓는 표정도 사랑스러웠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나를 만나러 와줘서, 나와 함께 해줘서, 고마워. 사와무라. 생일 축하해.”
진지한 미유키의 목소리에 부끄러워졌는지 새빨갛다 못해 까매진 얼굴로 사와무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유키”
진지한 목소리에 응, 하고 대답하자 사와무라는 침을 한 번 삼키더니 말을 꺼냈다.
“그래도 다음 해는 오프 받아오십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지만 제대로 요구하는 목소리에 미유키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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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늦은 건 미유키가 아니라, 나지만ㅇ<-<
못치 생일에 에이준 축하글 쓰고 있어서 미안하다ㅠㅅㅠ)/ 쿠라모치도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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