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봐라. 티난다, 야."
친구보다는 동료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쿠라모치의 조언을 빙자한 핀잔에도 미유키는 사와무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흔하지않은 미유키의 순수한 미소가 괜히 배알이 꼴려 쿠라모치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좋냐? 답을 바라고 던진 물음은 아니었는데, 미유키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좋아' 라고 말했다.
전날 밤 미유키는 사와무라와 연인이 되었다. 짝사랑 상대였던 사와무라의 고백에 의해서 였다.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라 오히려 꿈인가, 하는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고시엔 진출이 확정된 겨울'이라는 상황이 아니라 같은 남자이기 때문에 조용히 묻어둔 마음이었다. 스스로도 잊었다 생각할 만큼 깊숙히 잠들어 있던 연심은 사와무라의 한 마디에 폭발하듯 끓어올랐다. 거절을 예상하며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와무라는 미유키 앞에 당당히 서있었다. 마운드가 아닌 곳에서, 미트가 아닌 미유키 카즈야를 똑바로 쳐다보던 뜨거운 눈빛이 새삼 미유키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글거리던 눈빛이 물기를 머금는 모습까지 보고서야 미유키는 사와무라에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게 이어진 침묵에 도망가버린 사와무라를 천천히 뒤쫓으며 미유키는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막고 표정관리를 했다. 그라운드를 두 바퀴 돈 덕분인지 미유키는 제법 어른스럽게 대답을 돌려줄 수 있었다. 발그레진 얼굴로 작게 웃던 사와무라가 아직도 눈에 선해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와하하, 하고 크게 웃던 사와무라가 문득 고개를 쑥 빼서 주위를 살폈다. 구부정하게 턱을 괴고 있던 미유키의 자세도 따라 쭉 올라갔다. 마침내 둘의 눈이 마주쳤다. 평소처럼 팔을 쭉 뻗어 머리 위로 크게 흔드는 사와무라의 얼굴에는 수줍음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는 것만 같았다. 연인인 자신에게만 보여줄 표정이라 생각하니 귀여워서 참을 수 없었지만 미유키는 책상 아래로 주먹을 꽉 쥐며 남은 한 손으로 가볍게 인사했다. 지금 막 발견한 것 같은 능청스러운 손짓이었다. 얼씨구, 하는 쿠라모치의 추임새가 들렸지만 미유키는 신경쓰지 않았다.
조심스럽고 서툰 첫 사랑, 그리고 첫 연애였다.
남들에게 당당히 말할 수 없는 둘의 연애는 조용하게 이어졌다. 금방 말실수를 하거나 수상한 몸짓을 보여 의심을 살거라 생각했던 사와무라는 미유키가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정도를 지킨 덕분이었다. 만약의 일이 일어났을 경우 이번에야말로 먼저 당당하게 둘의 사이를 인정하려했던 미유키에겐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한편으론 그만큼 이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거라 생각되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와무라만 생각하면 심장이 날뛰고 얼굴이 붉어져 하루에도 몇 번씩 심호흡을 해야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와무라도 이럴까 하고 생각하면 심호흡으로도 진정되지 않을만큼 달아올라 곤란해지곤 했다.
여유시간이 없는 탓도 있었다. 둘의 스케줄은 눈을 뜰때부터 감을 때까지 야구 이외의 일은 생각할 수 없을만큼 팍팍하게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주장이라는 자리에 있어 남들보다 더 바쁜 미유키와 자타공인 연습벌레 사와무라가 둘 만의 시간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야구에서 특별한 관계로 불리는 밧데리였기 때문에 붙어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미유키는 주전포수였고 사와무라는 아직 에이스가 아니었다. 공식 연습시간에 사와무라와 붙어있으면 있을 수록 사와무라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미유키는 잘 알았다. 일부러 후루야를 우선하고, 한참을 조르는 사와무라의 말을 억지로 들어준다는 듯이 저녁 연습을 함께 했다. 가만히 놔두면 오버워크하니까 지켜본다는 핑계는 다른 부원들에게는 충분히 납득가는 이유였다.
가끔은 사와무라가 실수를 하는 것보다 미유키가 주장으로서 중도를 지키는 게 더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언제나 생각에서 그쳐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연인이기 이전에 포수이자 선배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와무라가 최종적으로 어떤 투수가 될지 제일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그였기때문에 더욱 그랬다. 마운드 위에서 진정하지 못하는 사와무라에게 독한 말을 내뱉을 때는 항상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말리거나 위로의 말을 건네는 다른 녀석들을 보며 제 자리를 뺏긴 기분에 남모르게 질투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속을 태웠다.
미유키는 그런 날이면 꼭 사와무라를 불러냈다. 시간은 항상 모두 잠들었을 한밤중이었다. 가장 오랜 이닝을 소화하는 만큼 피로를 풀어줘야 한다고 늘 말해왔지만 어느샌가 그는 항상 한 입으로 두말을 하고 있었다. 쑥스러워하며 조심히 불러냈던 애인 미유키가 사라지고 포수 미유키가 되어 안 자고 왜 나왔느냐 잔소리하면 사와무라는 다 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애인이 부르는 데, 사나이 된 자로서 어찌 잠만 자고 있겠음까!' 하고 큰 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피곤함이 가득 쌓인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사와무라에게 미유키는 쩌렁쩌렁한 그 목소리를 핀잔 주는 대신 가만히 그의 어깨를 만져주었다. 사와무라가 주인의 손이 닿은 고양이마냥 가늘어진 눈으로 긴장을 푸는 것이 손 끝에서 느껴질 때가 미유키의 피로도 풀리는 시간이었다. 미유키는 천천히 손을 움직이며 조심스럽게 낮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당시의 상황, 그 때 사와무라의 상태, 마음가짐, 그 때 왜 그런 말을 했는 지, 본심이 아니었다는 진심을 헛기침과 함께 털어놓아도 사와무라는 듣는지 마는지 대꾸가 없었다. 듣고있냐고 재촉하면, '미유키 안마 진짜 잘함다.' 한숨과도 같은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힘을 쭉 빼는 한편 뿌듯하게 만들었다. 미유키는 괜히 퉁명스레 '선배가 말하는 데 듣지도 않고, 하늘같은 선배한테 안마심부름이나 시키고' 하고 말하곤 했다. 정확히 따져보면 사와무라가 미유키에게 안마를 해달라고 시키지도 조르지도 않았으니 그 말엔 어폐가 있다. 하지만 사와무라는 그 점을 지적하는 대신 '선배가 아니고 애인이니까 괜찮슴다'하고 씩 돌아보며 웃어보였다. 분한 마음에 괜히 '말은 잘해'라고 말하면 '그래서 싫슴까?'하고 되물어 미유키는 할말을 잃었다. 꾹 다물어버린 입 대신 고개만 절레절레 젓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 사와무라는 '나도 좋아함다.'하고 말했다.
사와무라는 이렇게 단 둘이 있을 때면 가볍게 사랑을 전하곤 했다. 행여나 입 밖으로 꺼내면 날아갈까, 사라질까, 사와무라가 제 마음과는 다른 것 같다, 착각이었다 말할까봐 동의의 말도 하지 못하는 미유키와는 달랐다. 그래서 일까, 미유키는 사와무라가 마음을 전하면 전할 수록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제 속의 감정이 사와무라의 것보다 무겁고 질척거리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해맑게 웃고있는 사와무라를 붙잡고 제 앞에서만 웃으라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도 몇 십번, 미유키는 진짜 속마음은 감추기로 마음먹었다. 어려움은 없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사와무라의 가벼운 사랑에 고개를 끄덕여주면 되었으니까.
제 연인은 담아두고 있기엔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조금씩 흘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비어가는 마음을 채워주지도 않고서.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는 생활이었다. 스치듯 손을 만지고, 늘어가는 굳은살에 뿌듯해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 구속이 올라 기뻐하는, 남 모르는 연애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사와무라와 함께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여름이 생각보다 이르게 끝나고,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무슨 말이냐고 묻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눈 앞이 깜깜해 사와무라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헤어지자고 했음다. 볼 수 있는 시간도 이제 별로 없고. 나도 이제 1년 밖에 안 남았고. 나 에이스가 되고 싶으니까. 더 이상 다른 데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어차피 당신 나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슴까. 아니, 하나 물어볼게요. 나 좋아했던 적은 있었음까?
하나 하나,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는 사와무라의 변명에 그래서? 그게 왜? 어째서? 라는 말 밖에 생각나지 않던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마지막 말에 말문이, 아니 숨이 막힌 듯 했다. 어째서 사와무라가 자신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좋아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냐고 물었다면 앞의 말과 함께 전부 농담이었구나 하고 웃어 넘길 수 있을 텐데, 겨우 돌아온 시야 속 사와무라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미유키는 문득 사와무라가 고백했던 날 밤을 떠올렸다. 뜨겁게 타오르던 눈빛은 어느새 차게 식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보지 못한 건지, 보지 않은 건지.... 미유키 카즈야. 하고 사와무라가 대답을 재촉하듯 이름을 불렀다. 미유키는 겨우 응. 하고 대답을 토해냈다.
미유키의 대답을 헤어짐에 대한 긍정으로 들은 것인지, 물음에 대한 답으로 받은 것인지, 불린 이름에 대한 대꾸로 생각한 것인지 미유키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사와무라는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안녕.' 하고 짧은 인사와 함께 떠났다.
확실히 은퇴한 3학년과 현역 선수는 만날 기회가 적었다. 어쩌다 한 번 마주칠 때마다 사와무라만 노려보고 있는 미유키와 달리 사와무라는 미유키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매일 사와무라가 부족해서 힘든 미유키와는 달리 사와무라는 평소와 똑같아 보였다. 이렇게 되니 미유키는 사와무라야 말로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줄곧 생각했던 것처럼 착각이었다 깨달아 괜히 그의 핑계를 대며 헤어진 게 아닌가하는 결론이 내려질 쯤에 미유키는 정말 한계에 몰려있었다.
점점 퀭해지는 얼굴로 쉬는 시간마다 쪽잠을 청하는 미유키를 쿠라모치는 정말로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내려다 보곤 했다. 방에 쳐들어와서 아무 말 없이 관절기를 쓰고 간 날도 있었고, 교실에 쳐들어와 그러니까, 있을, 진작, 으아아아아!!! 하고 몇 마디를 벙긋 거리다 말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날도 있었다. 최대한 끼어들고 싶지 않아보였던 쿠라모치가 입을 뗀 것은 미유키가 프로 입단을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팀의 성적과는 별개로 미유키는 제법 여러 구단에서 러브콜을 받았고, 제법 골라간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쟁쟁한 팀을 두고 미유키가 고민한 것은 구단의 연고지였다. 어떻게 알았는 지 쿠라모치는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와 가고 싶은 대로 가라고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몰라 뭐? 하고 되묻자, 인상을 팍 쓰고 협박이라도 하는 얼굴로 보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멱살을 움켜쥐었다.
'지금도 건물 하나 떨어졌다고 보면 얼마나 자주 본다고. 졸업하면 글렀어. 아니 지금도 이미 글렀어. 포기해. 정신을 차리던가 구질구질하게 붙잡고 늘어지던가 해. 미련 뚝뚝 남은 얼굴로 버려진 개처럼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내가 말 안하고 모르는 척 하려고 했는데 진짜 못 봐주겠다. 말 꺼낸김에 다 하겠는데 그러게 옆에 있을 때 잘했어야지. 그 놈 바보인 거 모르냐? 야구 할 때 쓰던 머리는 어디다 갖다 버렸어? 직구 정중앙만 던져대던 요령없는 놈을 그새 잊어?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말을 해줘야 애가 헛생각을 안하지, 임마!'
솔직히 쿠라모치가 하는 말의 절반은 알아 듣지 못했다. 어느 순간 사와무라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집중하려 했지만 미유키의 귀에 제대로 들어온 말은 마지막 뿐이었다. 사와무라가 헤어질 때 했던 말이 함께 떠올랐다. 좋아했던 적이 있었냐 묻는게 당연했다. 미유키는 한 번도 사와무라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전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그걸 몰라? 하는 억울한 마음이 동시에 솟아올랐지만 조금 전 들은 쿠라모치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 했다. 사와무라는 바보였다. 그리고 미유키 자신도 바보가 된 모양이었다.
'사와무라 좀 불러줘.' 내가 왜.' '도와준 김에 끝까지 좀 부탁해.'
징그러워 새꺄, 라고 쿠라모치는 타박을 주면서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2그라운드 입구. 퉁명스럽게 내놓은 짧은 말이었지만 미유키는 오랜만에 해맑게 웃었다. 표정 관리를 할 생각따윈 이제 없었다. 얼굴이 보이면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서툴기 그지없는 자신의 밑바닥까지 보여줄 생각이었다.
변함없이 서툰 첫 사랑이었지만, 상대를 위한 두 번째 연애가 시작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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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툴고 불안해 보였나요
그건 내가 진심이었단 증거입니다
소중하지 않았다면
왜 그토록 마음을 기울였겠어요
망설이고 비틀거리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황경신 - 밤 열한시
라는 시를 보고 문득 생각나서 쓰기 시작했는데 속도가 너무 느려서 결국 쓰고 싶었던 사와무라와 미유키의 말다툼(?)은 못쓰고 여기서 끝... 나중에 시간이 나면 추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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