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와에게 보내는 키워드 : 하늘, 전화, 거짓말



태풍이 지나가고 난 여름 하늘은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맑게 개어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늘 그랬지만 이런 맑고 쨍한 하늘은 특히 사와무라 에이준의 가슴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굳이 사와무라에 한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고교 야구를 지나온 이들 중 덥고 눈부시던 그 여름에 아무런 후회도 남기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사와무라 역시 고교 야구를 떠올리면 바득바득 올라가 전국제패를 거머쥐었던 3학년 여름이 아닌, 어이없는 실수로 2회전에서 떨어지고만 2학년 여름이 먼저 생각나곤 했다.

태풍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비가 몰아치던 그라운드. 좀처럼 점수가 나지 않아 긴장으로 날 선 분위기. 젖은 손에서 공이 잘못 빠져나가는 감각. 빗소리를 뚫고 들려온 크게 얻어맞는 소리. 좌익수에 있던 후루야의 넋 나간 표정. 그 무엇 하나 잊을 수 없는 악몽의 순간이었다. 신뢰를 받기 시작한 2학년 투수 두 명의 연달은 실수로 점수를 빼앗긴 상태에서 우천콜드패라니, 누구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단 한 사람, 미유키 카즈야를 빼놓은 3학년 전체가 항의하고 분통의 눈물을 터뜨리는 것을 사와무라는 말을 잃고 지켜봤었다.

회상 끝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이름에 사와무라는 한숨을 내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그랬다. 그 사람을 빼놓으면 사와무라의 고교 야구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으니 야구를 떠올린다는 것은 그 사람을, 미유키를 떠올린다는 것과 동일했다. 애초에 비 개인 하늘은 사와무라에게 미유키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날 내린 비가 억울해질 정도로 맑게 갠 아침이었다. 지난번처럼 침울해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분노밖에 표할 수 없는 사와무라는 그만큼 달릴 수밖에 없었다. 굳이 얼마나 달렸는지는 세지 않았다. 꽤 향상된 체력으로도 토기가 치밀고 눈앞이 어지러울 때까지 달렸으니 3,40바퀴는 가볍게 넘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어이-'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멈추지 않고 달릴 생각이었다. 아니, 그 목소리가 미유키만 아니었다면 좀 더 달릴 생각이었다. 다른 3학년들은 아직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었다. 미유키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전날 울지 않았던 미유키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사와무라에게 천천히 다가온 미유키는 말했다.

"너 이제 슬슬 이럴 때마다 오버워크 하는 거 그만두는 게 어때?"

이젠 나도 없다고? 하고 작게 덧붙이는 목소리엔 웃음기가 있었다. 역시, 라고 생각하며 상황파악 못하고 두근대는 가슴을 탓하며 사와무라는 고개를 들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붉게 부어오른 눈으로 미유키가 웃고 있었다. 두둥실 떠오르려던 심장이 바닥으로 패대기쳐진 기분이었다.

",, 별로 오버워크는 아님다."

사와무라는 겨우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울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2년 반의 고교 야구가 끝난 것이다. 그 곳에서는 울 수 없었을 뿐이었다.

"거짓말인 게 뻔히 보인다고? - 아직도 호흡 거칠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거짓말 아님다. 그냥 조금 달렸음다."

크게 심호흡하며 부정하자 그걸로 됐다는 듯 미유키는 더 진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바늘로 변해 사와무라의 심장을 찔렀다. 몇 번 보지 못한 산뜻하게 웃는 얼굴이 아프게만 보여서 시선을 피했다. 금방이라도 '너는 단순해서 전부 보이니 거짓말 할 생각 말라고 했던 게 기억나지 않느냐'고 놀릴 것 같았는데, 미유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와무라, 하고 이름을 불려 네, 하고 대답했지만 또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고개를 돌려 미유키를 바라볼 용기는 없어 가만히 기다렸다.

"네 잘못이 아니니까,"

"후루야의 잘못도 아니고,"

"운이, 운이 없었던 거야."

사와무라에게 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서 사와무라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가득 솟아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흘러넘칠 것 같았다. 미유키에 대한 마음 역시 그랬다. 전할 수 없는 마음이 앗, 하는 사이에 가득 차 있었다. 흘러넘치지 말라고 더 큰 그릇으로 옮기고 옮겨 이젠 어디에 담아야 할지도 모를 마음이 사와무라를 채우고 있었다.

, 하고 조금 찬 손이 열기 가득한 사와무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눈물이 후두둑하고 떨어져 내렸다. 마음이 흘러넘쳤다.

"죄송, 함다."좋아해요.

",죄송함다."좋아합니다.

"죄송함다."은퇴하지마세요.

 

그날 사와무라는 전할 수 없는 다른 말들 대신 끝없는 사과를 했다. 미유키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겨우 한마디 '몸이 식겠다.'고 말했다. 퉁퉁 부은 눈의 사와무라를 5호실로 데려다 준 미유키는 전화기를 잠시 달라고 해서 받아가더니 한참 무언가를 썼다 지웠다하다 돌려주었다. 돌려받은 전화기에는 '미유키 선배'라는 이름으로 전화번호와 메일주소가 저장돼있었다.

"저 메일 같은 거 잘 안하는데요."

사와무라의 툴툴대는 목소리에도 미유키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일단 가지고 있으라고 말했다. 가끔 힘들면 상담해 줄테니까. 하는 친절한 목소리에 당신 때문에 힘든 거니까 괜찮거든. 하고 속으로 대꾸했던 것도 사와무라는 잊지 않고 있다.

미유키의 '가끔 힘들면'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생각지도 못한 주장 자리를 받고, 그것을 추천한 이가 미유키라는 것을 듣는 순간, 사와무라는 당장이라도 미유키에게 무슨 생각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후루야가 여름 대회 이후로 폼이 무너져 가을대회가 걱정스러울 때도, 1학년 코슈와 2학년 카리바의 정포수 쟁탈전으로 부가 반파가 났을 때도, 그냥 아무 이유없이 다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미유키라고 적힌 글자만 보며 참았다. 미유키는 가끔 쿠라모치와 그라운드에 나타났지만 왜 상담하지 않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하고 사와무라는 생각했다.

졸업식 때는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눈물이 나지 않아 당황한 것은 사와무라 본인을 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냥 그렇게 잊히겠구나, 잊을 수 있겠구나, 하고 그 날 사와무라는 생각했다. 프로리그에서 활약하는 미유키의 소식을 들으며 사와무라는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전국을 제패했다. 덕분에 프로 권유도 제법 받았다. 아직은 미유키가 있는 세계에 들어갈 자신이 없어 거절하고 대학으로 진학했지만, 미유키가 있는 구단에서 온 연락에도 동요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젠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또 해가 바뀌고,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갔다. 시즌오프는 겨울인데도 사와무라의 한 해의 시작은 항상 여름이었고 한 해의 끝도 여름이었다. 비 개인 여름 하늘만 보면 차게 닿던, 아니 미지근했을 손을 되새기면서 이젠 잊었을 것이라 자신했다. 습관처럼 '미유키 선배'를 보고 있다가 문득 통화버튼을 누른 것은 그래서 였다. 뚜르르르- 하고 울리는 수화음을 멍하니 듣다 아차, 하고 끊으려 했을 때는 이미 상대방이 받은 후였다. 전화번호가 바뀐 거면 어쩌지, 훈련 중이었으면 어쩌지, 하고 소심해진 마음이 도망칠 곳을 찾았다.

[. 미유키입니다.]

단정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넘어왔다. 목소리가 조금 변한 것 같지만 말투는 그대로였다. 미유키가 받기 전에 하던 생각이 다시 떠올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놓고 말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길 거라는 생각에 간신히 나온 말은 어, 저기... 였다.

'여고생이냐!'

사와무라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어 손에 얼굴을 묻었다. 볼 넷에 주자를 내보내고 홈런을 맞은 상황에서도 이런 긴장감은 없었다.

[여보세요? 사와무라냐?]

사와무라는 순간 환청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 귀에서 휴대폰을 떼어 화면을 바라보니 통화마크와 미유키의 이름과 지금도 1초씩 늘어나고 있는 시간이 확실하게 보였다.

", . 여보세요."

[뭐야, 역시 사와무라인가.]

", 어떻게 알았슴까?"

[? 목소리 들으면 알잖아.]

저 세 글자 말했는데요. 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조금 전 자신의 소심함이 부끄러워서 였다. 전화번호가 바뀌었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 역시 바보처럼 느껴졌다. 전화걸기 전에 하던 생각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이 콩콩 뛰고 있었다.

"보통 그 정도론 모를검다. 안 바쁘심까?"

[, 오늘은 오프. 사와무라는?]

"저도 오늘은 쉼다. 어제 태풍 때문에 연습시합이 취소됐음다."

어제도 만났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오가는 대화가 신기했다. 사와무라는 그 이유가 자신보다는 미유키에게 있다는 것을, 정확히는 미유키가 '왜 전화했냐.'는 류의 말을 하지 않아서 라는 것을 알아 고맙고, 기쁘고, 부끄러웠다.

[그래? 그러면 만날까?]

"?"

[둘 다 한가하잖아? 30분 후에 너네 학교 근처 역 앞에서 만나자.]

그럼, 하고 전화가 끊겼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고 사와무라는 생각했다. 이제 와서 통화버튼을 눌렀던 자신을 원망하기엔 늦었고, 무엇보다 씻고 준비할 시간도 빠듯했다. 사와무라는 어떻게 미유키가 자신의 학교를 아는 지 의문을 품을 시간도 없이 허겁지겁 몸을 움직였다.

애초에 감정을 숨기는 게 서툰 투수의 마음을 포수가 모를 것이라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사와무라가 아는 날은 아마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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